천쉐 (찬쉐 아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중 제대로 읽은 책이 그다지 많지 않은데, 그나마 우리 한강 작가님 책이 목록에 있어서 참 다행이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찬쉐'라는 중국의 거장이 있다. 평론가와 대중을 둘 다 만족시키는 거장을 찾아보기 워낙 어렵기도 해서 별 기대는 안 하고 그분의 책을 읽었는데(<신세기 사랑이야기>), 정말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사건과 사건이 뚝뚝 끊기며 발생하는데 대체 무슨 의미를 부여하며 읽어야 할지... (작년 수상자 크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탱고>도 마찬가지였다.)
도서관 서가를 한가로이 거닐며 무슨 책을 빌려볼까 천천히 둘러보는데, 중국 쪽 세션에서 찬쉐의 책이 몇 권 있길래 다시 한번 도전해 보려고 책을 집어왔다. '인간의 욕망이 쌓아 올린 현대사회의 축소판 마천대루, 그곳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여자. 모두가 범인인 동시에 누구도 범인이 아니다.'라는 뒤표지의 소개글에 '오오 이 책은 제법 잘 읽히겠는데? 거장이 말아주는 스릴러인가?'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마천대루라는 타이베이의 45층짜리 아파트의 주민(혹은 관련자)들이 한 명씩 등장한다.
셰바오뤄: 마천대루의 경비원 중 한 명. 평범한 은행원이었으나 출근길에 갑자기 튀어나온 보행자를 차로 치어 죽게 한 후 그 트라우마에 깊이 빠져 직장도 잃고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도 잃고 방황하며 스스로를 학대한다. 마천대루의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게 되지만, 거주자 중 휠체어를 타고 매일 산책을 다니는 여인에게 사랑에 빠졌다가 그녀의 병이 깊어져 세상을 떠나게 되자 또다시 정신적인 방황을 시작한다.
중메이바오: 마천대루의 거주자이자 건물 1층 카페의 매니저.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이다. 예쁜 매니저가 있다는 소문에 카페는 문전성시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응한다. 그러나 어릴 적 엄마의 문란한 남성 편력으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로 자랐으며, 계부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했다. 아빠가 다른 남동생과 함께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겨우 버텨내 성인이 됐지만 엄마의 도박빚 때문에 채무자들을 피해 이곳저곳에서 살다가 마천대루에 정착했다.
린멍위: 마천대루의 거주자이자 부동산 중개인. 1,000세대가 넘는 마천대루에서 발생하는 다수의 중개건을 처리한다. 그에게 은밀한 취미가 있는데... 그에게 거래를 맡긴 판매자의 집에 들어가 그의 불륜 상대와 관계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중메이바오의 친절함에 반했는데, 그녀의 옆집이 공실이 되자 에어컨 설치를 위한 통로를 타고 들어가 중메이바오의 집 안에 들어가고, 카메라를 설치해서 그녀의 사생활을 엿보는 변태다.
우밍웨: 중메이바오의 옆집에 사는 거주자. 치안이 안 좋은 나라에 여행을 갔다가 눈앞에서 일행이 강도를 당해 칼에 찔리는 장면을 목격한 후 그 충격으로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 이 질환으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로맨스소설을 써서 생계를 꾸려가고, 가사도우미 예메이리가 일주일에 네댓 번 와서 청소, 요리, 행정업무 등을 도와준다. 예메이리와 중메이바오의 친분으로 우밍웨도 중메이바오와 친해지게 되고, 중메이바오는 우밍웨를 위로해 주며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준다.
예미이리: 우밍웨의 가사도우미. 중메이바오의 카페에서도 일을 하며 카페 메뉴 개선을 도와준다. 유부남 애인과 20년째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저장+쇼핑 강박증이 있어서 막상 자신의 집은 온갖 물품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리모리: 마천대루의 거주자이자 린다썬의 아내. 현재 임신 중이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린다썬과 만나 평범한 주부가 된다. 그런데 남편이 요즘 들어 루틴에 벗어나는 행동들을 해서 불륜을 의심한다.
린다썬: 마천대루의 거주자이자 건축사무소 대표. 아내 리모리와 결혼하면서 장인에게 도움을 받아 사업가가 됐다. 사실 그는 중메이바오가 어릴 때 그녀의 엄마가 일해주던 가게의 아들로, 중메이바오와 옌쥔 남매가 다양한 가정폭력에 휘말려 힘들어할 때 그들을 돌봐준 착한 옆집 오빠였다. 하지만 그 시절 10대 후반이었던 린다썬은 중메이바오를 아끼는 동생일 뿐 아니라 성적 대상으로도 인식했고, 중메이바오의 계부(새끼)가 사고를 쳐서 투옥된 후 다른 곳으로 이사 가면서 인연이 끊겼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러다 결혼 후 마천대루에 살면서 카페에서 우연히 중메이바오와 재회했고, 성인이 되어 이제 거리낄 것이 없게 된 그들은 미친 듯이 불타오르는 (육체적) 사랑을 나누게 된다.
옌쥔: 중메이바오의 이부동생. 굉장한 미남이라고 묘사된다. 어릴 때부터 정신머리 빠진 엄마(온갖 질 나쁜 남자들을 계속 갈아타며 만나고 매춘까지 한다)와 살면서 방치되어 자랐고, 엄마가 만나는 남자들에게 폭행당했으며, 특히 자신의 친부 옌융위안은 옌쥔이 보는 앞에서 중메이바오를 지속적으로 성추행했다. 그렇게 자란 아이의 정신이 온전할 리가 없는데, 조현병에 걸려 입퇴원을 반복하는 성인이 된다. 일주일에 한 번씩 누나 집에 찾아와 누나와 서로를 알몸으로(!) 위로한다.
각 인물들의 사연이 지루하지 않게 소개되고, 인물과 인물의 관계가 조금씩 이어진다. 그러다 마천대루의 꽃인 중메이바오가 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그녀의 시신은 사망 후 누군가 꾸며놓은 듯 예쁜 옷을 입었고 얼굴엔 화장도 되어있는 기괴한 모습이었다. 대형 아파트지만 많은 거주자들에게 사랑받는 카페 매니저였던 중메이바오의 살해 소식은 삽시간에 타이베이의 언론에까지 퍼져 화제가 된다. '누가 중메이바오를 죽였나?'
거주자로 소개된 인물들이 이제 용의자가 됐다. 특히 린다썬, 린멍위, 셰바오뤄, 옌쥔은 주요 용의자로 의심받는다. 경찰에게 조사받으며 진술하는 내용을 그대로 옮긴 듯한 서술 방식이 독자를 더 집중하게 만든다. 모두 자기가 죽인 것이 아니라면서 중메이바오를 그리워하는 인물들. 죽고 나서 용의자들의 이야기를 퍼즐조각처럼 맞춰보면 중메이바오의 생글생글 웃으며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던 카페 매니저로서의 모습 뒤에 숨겨진 어두운 사생활이 등장한다. 대체 누가 그녀를 죽인 걸까?
마천대루라는 거대 주상복합 안에 사는 수많은 도시 사람들은 서로와 서로를 모르고 건조하게 살아간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외로운 사람들 하나하나는 알고 보면 어딘가 고장 나 있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힘을 얻지만 그 관계가 항상 건강하진 않다. 비극적인 죽음 뒤에 숨겨진 자극적인 사연 때문에 온갖 언론에서 호들갑을 떨어도 딱 1년만 지나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대도시의 생태를 작가는 꼬집는다.
이렇게 자극적인 내용의 통속소설을 '중국의 카프카'가 썼다니 믿어지지 않아서 다시 한번 검색을 해봤다. 아뿔싸... 중국의 카프카는 찬쉐고 마천대루의 작가는 대만의 천쉐였다. 어쩐지 <신세기 사랑이야기>와는 너무나도 다른 소설의 방향과 문체더라...
검색해 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좋아하는 문지혁 작가님도 비슷한 착각을 했더라. 착각 덕분에 나도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출처: 조선일보 칼럼)
[문지혁의 슬기로운 문학생활] [8] 찬쉐와 천쉐
얼마 전 전자책 서점을 둘러보다가 찬쉐가 쓴 글쓰기 관련 책이 보여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덜컥 구매 버튼을 눌렀다. 찬쉐라면 ‘중국의 카프카’로 불리는 거장 아닌가. 발표하는 작품마다 찬사를 받으며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솔직히 나는 찬쉐의 작품을 한 권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가 쓴 작법서에 먼저 마음이 갔다. 마치 거기엔 거장이 된 그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아서. 마침 오래 비행기를 탈 일도 있어 나는 도토리를 쟁여 놓은 늦가을 다람쥐처럼 마음이 든든했다.
그런데 막상 고요한 기내에서 책을 펼쳐보고(실제로는 그냥 화면을 터치했을 뿐이니 이는 일종의 은유다) 몹시 당혹스러워졌다. 책의 저자는 찬쉐가 아니었다. 천쉐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깨닫기 위해 나는 꽤 긴 시간을 들여야 했다. 알고 보니 중국의 찬쉐만 있는 게 아니라 대만의 천쉐라는 작가도 있었다. 당연히 나는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는 작가였다. 하지만 어쩌랴.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일단 읽기 시작했다. ‘오직 쓰기 위하여’. 적어도 제목은 알고 고른 책이었고, 그 제목이 나를 매혹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의도치 않게 읽게 된 그 책에서 나는 많은 감명을 받았다. 전자책이지만 밑줄을 너무 많이 그어 책 전체가 빨갛게 보일 정도였다. 가난과 싸우는 퀴어 작가로서, 그는 밤새 야시장에서 티셔츠를 팔고 원고료를 협상하며 배송 트럭에서 소설을 구상한다. 시장에서 누가 그를 알아보고 ‘혹시 천쉐 작가님 아니에요?’라고 묻자 기를 쓰고 아니라고 대답하는 모습에서는 나 자신의 일부를 보는 것도 같았다.
독서든 인생이든 우리는 실수도 하고 오해도 한다. 하지만 삶이 정답만을 맞히며 나아가는 시험일 수는 없다. 문학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어쩌면 정반대의 얘기다. 한번 틀려봐. 그럼 더 근사한 일이 생길 거야.
<마천대루>는 2020년에 드라마화되어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지금은 OTT 웨이브/왓챠에서 볼 수 있다. '안젤라베이비'가 중메이바오 역을 맡았다고 한다. 책 내용만으로도 워낙 자극적이어서 드라마까지 볼 생각은 없지만, 어느 친절한 블로거가 드라마 내용을 정성스럽게 정리해 놔서(마천대루 摩天大楼 줄거리 및 결말 │ 안젤라베이비, 곽도, 양자산, 초강 : 네이버 블로그) 그걸 보니 더욱 볼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됐다. 소설을 일부 각색한 것 같은데, 드라마도 굉장히 재미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