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련
박서련 작가님은 어느 해인가의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이라는 단편으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게임 실력이 곧 권력인 남자 중학생 세계에서 아들에게 권력을 안겨주기 위해 엄마가 나서서 롤을 배우는 이야기.
그 뒤로 오디오북으로 들은 <체공녀 강주룡>은 일제강점기 평양 을밀대 위에서 아마도 최초로 여성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고공농성을 했다고 짧은 기록이 남은 강주룡의 이야기이다. 혼인 후 독립군 시절과 이후 평양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겪는 서사의 빠른 전개와 주인공의 명확한 감정 흐름 덕택에 오디오북으로 들어도 눈으로 읽는 것보다 더 재미있었다. 워낙 성우들이 이북 사투리를 워낙 잘 구사하기도 했고. (“일 없습네다.”)
<폐월: 초선전>은 여성 인물 중 가장 비중이 큰 편이지만 다른 곳에 어떤 여인이 등장하는가 짚어보면 거의 유일한 여성 인물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초선의 이야기이다. (유비의 미부인/감부인, 조조가 빼앗는 대교/소교 정도가 스쳐 지나가지만 단역 수준) 삼국지연의에서 초선은 왕윤의 양녀로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시켜 여포가 동탁을 죽이게 한다. 그 유명한 연환지계의 히로인.
어떻게 초선이 왕윤의 양녀가 됐고, 어떤 마음으로 왕윤을 위해 동탁과 여포에게 몸을 던졌고, 왕윤이 죽는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해서 여생을 살아가게 됐는지 작가님의 상상력이 극대화된다. 강주룡의 인생을 마른미역 불리듯, 다섯 빵과 두 물고기로 수천 명을 먹이듯 짧은 사실은 뚝딱 책 한 권 분량으로 부풀어 오른다. 물론 그 안은 비어있지 않고 가득 차있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매들린 밀러의 <키르케>도 오딧세이아에 짧게 등장하는 키르케 이야기를 작가의 상상력을 담아 한 독립된 여성의 일대기로 써 내려간, 이 책과 유사한 컨셉의 책이었다. 그리스 신화나 삼국지 모두 어릴 때부터 내가 즐겨 읽던 책이고, 그 이야기들에서 파생되는 다른 이야기들을 좋은 작가가 써낸 책이라 꼼짝없이 사로잡혀서 읽어 내려간 것 같다.
스포가 될 수도 있어 자세한 서술은 않겠지만, 초선은 결국 삶을 선택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작가는 이를 ‘이상하지?’라고 묻는다. 아뇨,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좀 더 잘 살아도 좋았겠지만 스스로 선택한 삶이 무척 행복했길 바라는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