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태
압도적인 퍼포먼스다. 대단한 필력이며 엄청난 속도감이다. 직유와 은유가 어느 하나도 적절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한 문장 안에 몇 개의 동일한 품사를 나열하지만 산만하지 않다. 소위 말하는 떡밥을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회수해서 매조지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로도 충분히 힘있는 소설이 나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삶의 어두운 면이나 특정 성별의 힘듦이나 아직 우리나라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유형의 사랑을 소재로 하지 않았음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세상 모든 바다>
재일교포/한국인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는 주인공이 어느 아이돌의 덕후가 되어 발생한 사건으로 조금 더 혼란스러워진다. 작가는 아이돌 덕후의 세계를 어떻게 아는 거지..
<롤링 선더 러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나는 솔로’의 포맷을 차용했는데 배경이 농장이라니 천재다…‘너희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좆같아졌어?’ 라는 워딩이 찰떡같다.
<전조등>
평소 속도로 글을 읽었는데 속독을 한 기분. ’전조등이 깨지게 되는 어떤 사건‘이라는 떡밥을 던졌는데 사뿐히 무시하고 지나가도 무방할 속도감.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세대를 거쳐 만나게 된 두 남녀의 빈곤 로맨스. “친하게 지내라”라는 먼 과거의 예언이 뒤늦게 이뤄지는 과정. 빈곤한 청춘 남녀의 삶을 직접 겪은 겁니까 돋보기를 대고 들여다본 겁니까 작가님…
<보편 교양>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책을 많이 읽음에도 항상 ‘난 지성인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는 근원에는 ‘서울대 추천 고전 100선’따위의 고전들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는 자격지심이 있다. 반대로 그 고전 중 일부라도 읽었으면 지적 허영심/자만심이 생기기도 한다. 주인공의 그 자격지심과 지적 허영심 사이를 교묘히 파고드는 영민한 고등학생 제자의 이야기가 빠르게 펼쳐진다. ‘난 지성인인가? 아니, 그냥 독서 중독자 정도 아닐까.‘
<로나, 우리의 별>
한 뮤지션의 20년간의 일대기가 또다시 빠른 속도로 그려진다. 선한 영향력을 사회에 주고 싶어 하는 로나가 꿋꿋이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흥미로운 건 그에 영향을 받거나 반응하는 닉네임들이 곳곳에 등장하는 형식이다. 마치 위대한 한 뮤지션의 일대기를 코멘터리 위주로 그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본 기분이다.
<태엽은 12와 1/2바퀴>
그래서 사마귀는 누구고 검은 봉지 안에는 뭐가 들어있었냐고! 이 떡밥은 회수해 주셨어야죠 작가님 흑흑… 제 마음대로 상상하겠습니다.
<무겁고 높은>
아주 무거운 바벨을 높이 들면 끝, 들고 나서는 놓아버리면 되는 역도라는 운동을 시작했으나 다시 마무리하게 되는 어린 학생의 이야기. 바벨을 놓듯이 운동을 놓는 과정이 쇠락한 강원도 어느 지역을(아마 정선인 듯. 작가님 고향이 강원도인가..) 배경으로 그려진다.
<팍스 아토미카>
이 작품은 읽히지 않아서 안 읽었다.
가둬놓고 글만 쓰게 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게 소설 잘 쓰는 작가다. 시대소설? 통속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 거의 끝판왕이랄까. 그나저나 어느 인터뷰를 보니까 평생 잘 쓴 세 권의 책만 발표해도 충분하다고 하셨는데, 아닙니다 작가님.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소재가 무궁무진하게 나올 텐데요… 장편 안 쓰셔도 되니까 단편만 계속 발표해 주시면 저는 입 벌리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