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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by 김알옹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더블린 바닷가 절벽을 서먹서먹하게 걷던 남녀. 남자가 “이 반지 오다 주웠는데 이거 끼고 나랑 같이 살래?” 라며 툭 청혼하고, 여자는 “쳇… 그러던가…”라고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오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 작은 신혼집에서 살림을 차리고 어찌어찌 아이도 낳고 셋이서 마치 배경음악이 없는 영화처럼 고요하게 살아간다.


자, 여기에서 남녀의 삶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바꿔보자.

• 친부에 의한 지속적인 성폭행(친모의 방관과 무언의 압박을 곁들인)

• 속세의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가 차마 하느님을 저버리지 못해 다시 수도의 길로 돌아가 그 여인의 혼배미사를 집전해주는 사제

• 공들여 유혹해서 결혼해 놓고는 무시하고 방치하는 남편에게 복수하듯 외판원과 외도 후 그의 아이까지 낳아 남편의 아이인 양 키우다 결국 더 큰 복수를 무심하게 가하는 여인

• 하버드에 입학한 훌륭한 아들이지만 어머니가 선택한 부자 새아버지에게 지속적으로 성정체성을 비난/조롱/공격받는 동성애자

• 사제의 아이를 낳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잃고, 사제가 죽은 후 그가 살던 집에 들어와 살다가 옆집 남자의 아이를 낳게 된 용한 포춘텔러


하나하나가 다 주옥같은 소재가 무심한 듯 툭 던져진다. 그러나 책은 여전히 배경음악이 없는 고요한 영화 같으며, 위에 나열한 인간이 쌓아낸 더럽고 악한 이야기는 폭발음 없이 터지는 폭탄처럼 무해하게 느껴진다. 여기저기 온통 폐허가 된 절벽이지만 그 끝으로 걸어가 서서 바라보는 바다는 여전히 아름다운 것처럼. 작가의 단순하지만 섬세한 문장들의 힘이 아닐까 싶다. 영어 원문으로 읽으면 더 좋다고 하는데 그럴 정성까진 없다.




다들 가보는 해외를 20대 후반 취직하고 나서야 처음 가본 나는 어쩌다 회사에서 운이 좋아 중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여러 나라로 출장을 다녔고 대략 10년 전엔 아일랜드에 갈 기회도 있었다. 더블린은 기네스의 고장이니 맥주도 마시고 해안 절벽에서 바다도 보고 영화 <원스>에서 노래하던 골목도 가보고 아이리쉬 위스키도 마셔보고 다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출장은 나 혼자 간 출장이었고, 마침 한국 본사에선 일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낮에는 아일랜드 친구들과 일하고 그들이 퇴근하면 서울 사람들과 일하고, 그러다 심지어 하루는 새벽까지 일하고 아침에 호텔에 들어가서 점심에 다시 출근하기까지 했다. 일요일 저녁에 도착해서 토요일 아침에 출국하는 딱 일주일짜리 출장에선 기네스도, 해안도, 원스도, 위스키도 다 그림의 떡이었다.


무사히 일을 다 마치니 금요일 저녁 9시. 내가 일 가르쳐주려고 온, 출장의 목적이었던 직원인 조셉은 내가 안쓰러웠는지 그때까지 함께 사무실을 지켜줬고, 펍이라도 한 번 가야 하지 않겠냐며 날 무작정 끌고 갔다.


그들의 펍도 한국의 술집처럼 새벽까지 취객으로 넘쳐났고, 난 흑맥주와 위스키를 원 없이 마셨고,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더블린의 어느 밤거리를 조셉과 어깨동무하고 아무 노래나 불러제끼며 걸어 다녔다. 아침에 어떻게 일어나서 짐을 싸고 비행기를 탔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더블린 공항에서 체크인 후 스타벅스에서 시티머그 하나 사온 게 유일하게 남은 기념품이다. (아직도 잘 쓰고 있다.)





미안해요 클레어 키건 작가님. 작가님의 귀한 소설의 독후감을 뻔하디 뻔한 대한민국 직장인의 출장기로 은근슬쩍 바꿔놔서.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더블린에 다시 갈 일이 있다면, 반드시 작가님 책 영문판 원본으로 사서 바다가 보이는 오두막 같은 곳에서 읽으리다. 그때까지 본인 소설에서 이야기 툭 던지듯 가끔 서점에 신간도 한 권씩 툭 던져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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