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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by 김알옹

카스트 제도의 최상위층인 브라만으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고 싶어 아버지를 떠난다. 절친 고빈다와 함께 고타마 붓다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지만 혼자만의 깨달음을 얻고 싶어 고빈다를 남겨둔 채 붓다를 떠난다.


길을 떠난 싯다르타는 카말라라는 매춘부를 만나 육체적 쾌락을 배우고, 카말라의 소개로 카마스바비라는 상인을 만나 돈과 명예를 얻었다. 이 과정에서 싯다르타는 젊은 시절 그토록 얻고자 했던 깨달음과 점점 멀어지는 자신의 삶에 환멸을 느끼며 다시 홀로 길을 떠났다.


떠돌다 강 앞에서 사공 바수데바를 만난다. 그는 젊은 싯다르타가 고타마 붓다를 떠날 때 배를 태워준 사공이었다. 그와 함께 사공으로 지내며 강을 통해 깨달음의 길에 가까워진다.


그러다 카말라와 그의 아들(싯다르타의 아들)을 만난다. 카말라는 독사에 물려 죽고, 아들만 남게 된다. 싯다르타는 아들 앞에서 그동안의 깨달음을 버리고 아들에게 큰 정성을 쏟아 기르지만, 아들은 점점 멀어질 뿐이었다. 결국 아들은 그를 떠나고 싯다르타는 상심하여 아들을 찾아 헤매지만 바수데바가 그의 마음을 다시 다잡아준다.


강으로 돌아온 싯다르타는 강물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


줄거리를 정리하다 보니, 떠남의 연속이구나.




남과의 비교는 스트레스를 일으키는데, 한 남자의 생애를 다룬 책을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아직 반 밖에 살지 않았지만) 내 인생과 비교해 보게 된다.


나는 싯다르타처럼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나는 고빈다처럼 좋은 친구가 되어주지도, 평생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지도 못했다.

나는 카마스바비처럼 재물을 많이 모으지도 못했다.

나는 카말라처럼 육체의 쾌락을 많이 즐기지도, 남을 위해 베풀지도 못했다.

나는 싯다르타의 아버지처럼 자식이 자신의 길을 가도록 떠나보내지도 못했다.

나는 바수데바처럼 침착하지도, 누군가를 깨달음의 길에 인도하지도 못했다.


나는 이 책에 나오는 그 어느 인물만큼도 삶을 충만하게 살지 못하고 있다. 행복한 가족, 안정적인 수입, 육신의 건강과 같은 요소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그런 관점에서 깨달음을 향해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결국 그곳에 이르는 싯다르타의 삶의 여정을 읽어보는 건 나의 충만한 삶을 위해서도 좋은 밑거름이 된다는 생각이다.


아들에게 꼼짝 못 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는 싯다르타의 모습을 보면서, 이래서 많은 종교인들이 결혼을 안 하는구나… 예나 지금이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구나… 자식을 항상 품에 두고 싶어 하는 부모의 생각은 위험하구나…라는 교훈을 다시금 얻었다. 싯다르타가 자식 때문에 얼마나 고뇌하고 방황하는지, 바수데바는 얼마나 현명한 조언을 해주는지 아래 단락에서 알 수 있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아이에게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때마다 가끔 돌아와서 또 읽을 것이다.



(P.180~)
바수데바의 미소가 더 따뜻하게 퍼졌다.

“아, 그래요. 이 아이도 그런 운명을 타고났지요. 이 아이도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이 아이가 어떤 운명을 타고났는지, 어떤 길을 가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고난을 당하게 될지 당신이나 내가 알지 못하잖아요? 저 아이도 많이 힘들어할 겁니다. 당당하고 당차 보여도 번민도 많을 것이고, 방황도 많이 할 것이고, 부정한 짓도 많이 저지를 것이고, 죄도 많이 지을 겁니다. 말해 보세요. 당신은 자식을 길들이려고 하지 않나요? 자식에게 강요하지 않나요? 때리지는 않나요? 벌주지는 않나요?”

“아니요, 바수데바, 저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아요.”

“나도 압니다. 당신은 자식에게 강요하지도 않고, 때리지도 않고, 명령을 내리지도 않지요. 당신은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사실을, 물이 바위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사랑이 폭력을 이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아주 좋습니다. 당신은 칭찬받을 만합니다. 당신이 자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 벌주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혹시 당신의 착각은 아닌가요? 아이를 당신의 사랑이라는 끈으로 묶어 두는 것은 아닌가요? 혹시 아이를 날마다 부끄럽게 만들지는 않나요? 당신의 호의와 인내심이 아이를 더 힘들게 만들지는 않을까요? 당신이 거만하고 버릇이 나쁘게 든 저 아이를 바나나나 먹고사는 우리 두 노인네와 함께 오두막집에서 살도록 강요하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에게는 쌀밥이 맛있는 음식으로 꼽힐 정도지만, 우리의 생각은 저 아이의 생각과는 다를 터인데 말입니다. 우리네 심장은 낡았고, 잠잠하며, 저 아이의 것과는 다른 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아이가 강요받는 것은 아닌가요? 이 모든 것들이 아이에게 벌이 되지는 않나요?”

싯다르타는 당황하여 땅을 쳐다보았다.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제가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바수데바가 말했다. “저 아이를 도회지로 데려가세요. 아이 엄마 집으로 데려다주세요. 그곳에는 하인들이 아직도 있을 것이니, 하인들에게 아이를 맡기세요. 하인들이 한 명도 없다면, 스승을 찾아 저 아이를 그에게 맡기세요.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소년 소녀들과 어울리도록 말입니다. 아이를 속세로 보내세요. 그곳이 그 아이가 살아갈 곳이에요.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나요?”

“당신은 제 마음을 꿰뚫고 계시는군요.” 싯다르타가 슬픈 듯이 말했다. “저도 자주 그런 생각을 했지요. 그러나 바수데바여, 제가 어찌 저 아이를 속세로 되돌려 보내겠습니까? 그렇잖아도 마음이 여린 아이인데요. 그곳에서 흥청망청 살다가 쾌락과 권력에 정신이 팔리지 않겠습니까? 제 아비가 했던 모든 시행착오를 그대로 되풀이하지 않겠습니까? 저 아이는 그야말로 완전히 윤회에 빠지게 될 겁니다.”

사공의 미소가 환하게 퍼졌다. 그는 싯다르타의 팔을 부드럽게 건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저 강물에게 물어보세요, 친구여! 강물이 그 얘기에 웃는 소리를 들어보세요. 아들의 시행착오를 줄여주기 위해 당신이 지금까지 그 많은 바보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이 아들을 윤회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어떻게요? 가르침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경고를 통해서? 혹시 그 이야기를 완전히 잊었나요? 브라만의 아들 싯다르타에 관한 유익한 이야기. 이곳에서 당신이 언젠가 나에게 해주었던 그 이야기 말입니다. 누가 고행 수도승이었던 싯다르타를 윤회에서 지켜주었죠? 누가 그를 죄로부터, 소유욕으로부터, 바보짓으로부터 지켜주었나요? 아버지의 신심 깊은 태도였나요? 스승의 경고였나요? 싯다르타 자신의 지식이, 그의 노력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짓을 저지르지 않게 지켜주었나요? 어느 아버지가, 어느 스승이 그를 보호해 주었지요?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고,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더럽히고, 죄를 짓고, 쓰디쓴 술을 마시고, 제 힘으로 자신의 길을 찾지 않아도 되도록 그들이 그를 지켜주었나요? 아마도 당신 아들에게는 이런 길이 면제되어 있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아이를 사랑해서, 그래서 아이에게 번뇌와 고생과 환멸을 안겨주고 싶지 않은 거겠죠. 설령 당신이 아들을 위해서 열 번이나 죽는다 해도, 아들이 겪어야 할 운명의 아주 작은 부분도 덜어주지는 못해요.”

바수데바가 그렇게 말을 많이 한 것은 처음이었다. 싯다르타는 다정하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는 걱정하며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서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바수데바는 그가 생각해보지 않은 것, 혹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바수데바의 말을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소년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바수데바가 한 말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소년에 대한 애틋함, 소년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너무 컸던 것이다.

그가 일찍이 무엇엔가 그렇게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었던가? 그가 일찍이 그 어떤 사람을 그렇게 사랑한 적이 있었던가? 그렇게 맹목적으로, 그렇게 고통스럽게, 그렇게 아무런 성과도 없으면서도 행복한 마음을 잃지 않고 그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있었던가?

싯다르타는 친구의 조언을 따를 수 없었다. 아들을 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들이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었다. 아들이 무시해도 그대로 받아주었다. 그는 말없이 기다렸다. 날마다 말없이, 아들과 다툴 때에도 친절하게 대해주면서. 그는 아들과 소리 없이 다툴 때에도 인내심을 잃지 않았다. 바수데바도 말문을 닫고 기다렸다. 친절하게, 이해하며, 참을성 있게.

한 번은 소년의 얼굴을 보다가 너무나 간절하게 카말라가 보고 싶어졌는데, 그때 싯다르타의 머릿속에 갑자기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그 옛날 그가 젊었을 적에 카말라가 그에게 해주었던 말이었다. “당신은 사랑할 줄 몰라요.” 그녀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그녀에게 맞는 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별에,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떨어지는 낙엽에 비유했다. 그런데 이 순간 그 말이 꾸지람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그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빠져서 정신을 잃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을 망각한 채 다른 사람과의 사랑을 위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그 시절 그는 이것이 그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구분하는 커다란 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아들과 함께 살게 되면서, 싯다르타는 완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한 사람 때문에 고통받고, 한 사람을 사랑하며, 사랑에 빠져서, 사랑 때문에 바보가 되었다. 늦었지만 이제 그는 평생에 단 한 번 강렬하고도 신기한 정열을 느끼게 되었다. 정열은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는 몹시 아팠다. 그러면서도 행복했다. 뭔가 새로워지고 부유해진 느낌이었다.

이러한 사랑이, 아들에 대한 이 맹목적인 사랑이 번뇌라는 것, 인간이기에 이러한 사랑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 이러한 사랑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윤회이고, 탁한 샘물과 같은 것이며, 시커먼 뻘물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분명히 느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랑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러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본질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그는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쾌락은 참회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이러한 고통도 역시 한 번쯤은 맛보아야 하며, 이러한 바보짓도 한 번쯤은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 때문에 바보짓을 했고, 아들의 마음을 사려고 노력했으며, 변덕스러운 아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참고 또 참았다. 이러한 아버지에게는 기쁜 일도 없었고, 또 두려운 일도 없었다. 그는 착한 사람일 뿐이었다. 아버지로서 그는 착하고 자상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고, 아마도 매우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을 것이고, 또 아마도 성인(聖人)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특징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들을 이길 수 없었다. 아들에게 자신을 그곳, 궁색한 오두막에 붙잡아 놓은 아버지는 지루한 사람일 뿐이었다. 싯다르타는 아들에게 지루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버릇없게 행동해도 웃으면서 대해주는 지루한 아버지, 불평불만을 늘어놓아도 다정하게 대해주고, 얄궂은 행동에도 늘 선의로 대해주는 지루한 아버지. 그의 노력은 늙은 위선자의 가장 교활한 술수였다. 아들은 차라리 아버지가 협박하면서 가혹하게 대해주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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