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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사이

최미래, 성해나, 조시현, 최현윤, 이선진, 김유나

by 김알옹

'애매'라는 동인으로 활동하는 젊은 여성 작가들의 짧은 소설을 모은 책. 최미래, 성해나, 조시현, 최현윤, 이선진, 김유나 여섯 명의 글이 실려있다. ㅇㅁ라는 초성에서 각자의 주제를 하나씩 만들어내 쓴 소설들이다. (가령 성해나의 ㅇㅁ는 '야만')


다른 작가들의 소설은 재미도 감동도... 내가 딱히 좋아하지 않는 글이라 언급하지 않겠지만, 성해나 작가님의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는 그중 태양처럼 빛나는 작품이었다.


세 편의 소설을 계절마다 실어주는 문학과지성사의 <소설 보다>시리즈 중 <소설 보다: 겨울 2023>을 읽은 적이 있었다. 요즘 가장 주목받는 작가인 김기태 <보편교양>이 실렸는데, 김기태 작가님의 글도 아주 놀라운 작품이었지만 난 거기에서 성해나 작가님의 <혼모노>가 굉장히 재미있었다. 모시던 할멈 신령님이 다른 무당에게 떠나게 되어 좌절한 어느 박수무당이 자신의 의지를 다잡으며 직업적 전문성을 다시금 불태우는 빠른 서사가 소설의 매력을 잘 살려준 작품이었다. 마침 영화 <파묘>가 인기를 끌던 때여서 무속 소재가 더 흥미롭게 다가온 탓도 있었고. 그래서 내 마음속에 성해나 작가님에 대한 기대가 쌓였다.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는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축을 다룬 작품이다. 한 건축학과 교수가 정부로부터 어떤 건물의 설계를 의뢰받는다. 해양연구소로 위장한 조사실, 즉 고문실이다. 교수는 자신의 건축적 역량을 발휘하기엔 무언가 어긋난 이 건물의 설계를 자신의 제자에게 맡긴다. 제자는 성실하고 꼼꼼한 성격의 평범한 건축학도이니 이 특징 없는 건물의 설계를 잘 해낼 것이라 생각해 맡긴 것이다. 그러나 제자는 이 건물의 목적을 무섭도록 잘 파악하고 이에 최적화된 설계를 해낸다. 어딘지 모르게 비뚤어진 제자의 악한 모습에 교수는 치를 떨고, 건물은 그대로 완공되어 그 목적에 맞게 쓰인다. 악의 평범성을 아주 잘 그려낸 작품이다.




5층의 세로로 긴 창문은 햇볕을 아주 잠깐 받게 해서 고문받는 사람이 아주 잠깐 희망을 갖게 한다. 책에 이 창문의 설계 의도가 아주 잘 그려져 있음.


남영동 대공분실은 1987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그곳이다. (영화 <1987>에도 등장한다.) 행정구역 상으로 갈월동이자만 남영역 바로 뒤에 있는 건물이라 남영동 대공분실이라 불린다. 한국 현대 건축의 대가 중 한 명인 김수근이 설계했다. (김수근의 대표적 작품은 서울올림픽 주경기장이 있다.) 그와 현대 건축계의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김중업(무려 르꼬르뷔에의 제자)이 정권을 비판하여 한국에서 추방당한 전적이 있는 것과 반대로, 김수근은 독재정권의 부역자로 활동하며 저런 건물을 짓는 등 비판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천재 건축가가 고문실을 지으며 어떤 설계를 했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성해나 작가님 소설에 이 내용들도 언급되어 있다.


건물 정문이 아닌 건물 뒤의 쪽문으로 피해자를 끌고 들어간다.

5층 조사실의 창문을 아주 좁게 만들어서 최소한의 채광만 가능하게 하여 피해자에게 조금의 희망과 긴 절망을 준다.

나선형 계단으로 조사실까지 올라간다. 머리에 포대자루를 씌워 눈을 가린 채 올라가는 피해자는 감각을 상실하고 몇 층인지 알 수 없는 공포에 빠진다.

복도 양쪽의 고문실은 각자 문을 열면 벽만 보이도록 엇갈리게 설계했다.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없게 하고, 문이 열리면 생길 희망을 원천 차단하고 불안감을 심어주게 된다.

4층과 5층의 조사실엔 흡음판이 설치되었다. 고문으로 인해 5층 조사실에서 발생할 소음이 다른 층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미리 조처한 것이다. 그렇지만 흡음판 또한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일부러 소리를 완벽하게 차단하지 못하는 '목재 타공판'을 사용했는데, 목재 타공판이 제대로 흡수하지 못해 새어나간 비명소리는 낮고 음산한 소음이 되어 반대편 벽면으로 전달되곤 했다.

조사실마다 샤워기와 욕조가 설치되어 있다. 물론 물고문 목적이다.


악마가 지옥 설계까지 발주할 만한 실력 아닌가?


불과 3~40년 전까지 고문과 독재가 자행되던 나라에서 지금 이렇게 편안히 발 뻗고 살 수 있게 된 건 다 저 때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쳐가며 싸워주신 선배 시민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라면 저렇게 젊음과 목숨을 바쳐가며 싸울 수 있었을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봐도 답이 들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성해나 작가님은 이 정도의 작은 역사적 사실과 자료를 바탕으로 저렇게 쫙 감기는 맛이 일품인 소설을 썼다는 거지. 대단하다 소설가...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일이지만 내가 겪고 싶지 않았던 일의 대리 체험, 혹은 내가 겪고 있는 일이나 마음의 상태를 잘 묘사해 주거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현상들을 주인공이 겪는 사건들과 잘 버무려서 비판 혹은 관찰해 주는 것이 한국 현대 소설을 읽는 목적이다. 이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서 내게 도파민을 주는 작가들은 가끔 현실에서 잠시 눈을 돌려 과거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들을 소재로 쓰는 일에 도전하곤 한다. 난 그게 너무 좋다. 온갖 발전된 기술과 삭막한 도시에 둘러싸여 살다가 내가 살아보지 못한, 그러나 어디선가 한 번 들어보긴 한 세계에 날 데려가주는 작가님들의 능력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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