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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여름

성해나

by 김알옹

요즘 나에게 가장 핫한 성해나 작가님의 다른 작품을 읽으려고 빌려온 장편소설. (경장편...정도로 분류되면 맞겠다.)


사진관의 외아들인 주인공 기하가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가 새로 맞이한 새어머니와 새어머니의 아들 재하와 함께 지내게 된다. (새어머니는 이혼, 아버지는 사별) 10대의 사춘기 소년에겐 받아들일 수 없는 아버지의 재결합에 모두에게 날을 세우는 기하의 마음들과, 그 날카로운 마음이 일상의 작은 순간들에서 조금씩 그들에게 생채기를 내며 관계를 벌어지게 만든다.


기하와 재하가 각각 서로의 관점에서 그들이 보낸 시간들을 반추하고,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후 우연한 계기로 만나 어린 시절의 서로를 이해하게 되지만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비정에는 금세 익숙해졌지만 다정에는 좀체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두고 온 것만 같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 말을 뱉은 것을 후회했다.


재하에게 해주어야 했을 말들을 뒤늦게나마 중얼대보았다. 잘 지냈니, 보고 싶었어, 잘 지냈으면 좋겠다, 미안해 같은 평범하고도 어려운 말들. 이제 와 전송하기에는 늦어버린, 무용한 말들을.


이런 문장들에서 느껴지는 먹먹함, 아련함, 안타까움, 아쉬움. 책 전반을 타고 흐르는 감정들이다. 젊은 작가 중 감정을 다루는 솜씨는 김금희 작가님이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하는데, 성해나 작가님도 이 작품에서는 능수능란하게 이런 감정들을 잘 다룬다. 이 작가님은 어디까지 확장이 가능할까 궁금해지는 작품이었다. 여운이 남는 책.


책을 읽으면서 내내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석규님이 연기한 그 아련함의 이미지가 자꾸만 떠올랐다. 사진관이 등장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림1.png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중 마지막 장면. 아련하다. 군산에 가면 잘 보존되어 있다.




책에는 작가님 인터뷰도 수록되어 있다. 소설 한 편을 쓰기 위해 설계하듯 이야기와 감정 구조를 공들여 짠다고 한다.


그들의 관계는 역광 속에서 찍은 사진과 비슷해요.
온전한 마음이나 진심을 주고받고 싶었으나 잘 살려고 애쓰다보니 진심은 가려지고, 마음은 흔들리고, 그림자 같은 오해만 남았죠. 그래도 이들이 가족이 되고자 해온 노력이 실패나 아픔으로만 남지 않았기를 바라요.
너무 밝은 빛 속에 감추어둔 마음이 언젠가는 서로에게 닿을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 인터뷰 중


작가의 말에 등장인물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쓸 때마다, 내가 두고 온 인물들이 그곳에서 행복하기를, 평온하기를 빈다.

나도 모르는 세계에 그들만 남겨두었다는 죄스러움을 사하기 위함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들의 삶이 마침표로 끝나지 않고 쉼표로 남아 오래 흐르기를 희원하기 때문이다.

『두고 온 여름』을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하와 재하도 그럴 수 있기를, 그들이 살아갈 나날이 더욱 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그곳에서 기하와 재하는 몇 번의 여름을 맞을까.
몇 번의 사랑을 하고, 또 몇 번의 이별을 준비할까.

나는 어떨까.
이 소설을 읽는 당신은.

우리가 맞을 무수한 여름이 보다 눈부시기를.
어딘가 두고 온 불완전한 마음들도 모쪼록 무사하기를.

바란다.
- 작가의 말 중


추천사는 내 비루한 글솜씨로 그려낼 수 없는 책의 인상을 정확히 묘사해 준다.


우리가 두고 온 모든 인연과 마음을 위하여,
한 시절의 여운 속에서 전하는 애틋한 안부 인사.

대부분의 소설 속 인물들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뒤늦게 묻는다.
마음에 커다란 틈이 생긴 뒤에야.
혹은 틈이 너무 벌어져 무너진 뒤에야.

그러면서 틈이 생기기 이전,
아주 가느다란 실금이어서 거의 보이지도 않던 그 순간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

좋은 소설은 여기에서 결정된다.

뒤돌아보는 자의 시선,
뒤돌아보는 자의 태도,
뒤돌아보는 자의 윤리.

성해나는 제대로 뒤돌아볼 줄 아는 작가이다.
손쉽게 단정하지 않고, 함부로 이해하지 않는다.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질문을 곱씹고 곱씹는다.

작가의 사려 깊은 시선은 문장 곳곳에 스며든다.

“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기분.”

그 찰나를 문장으로 건져 올린다.

성해나의 문장은 정확하면서 예민하고,
명확하면서 깊고,
단정하면서도 힘이 세다.

책을 읽다 보면 이 모든 것이 조화롭게 천천히 스며든다.

“그래, 이게 읽는 맛이지.”

혼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 윤성희 소설가


3년 전에 읽은 정유정 작가님의 <완전한 행복>이 가장 최근에 감정을 뒤흔들어 놓은 책일 정도로, 난 평소 책을 읽어도 감정이 요동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 <두고 온 여름>에서 오랜만에 책을 읽고 마음이 움직였다. 이 단락을 읽을 땐 무언가 알 수 없는 묵직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맴돌아서 몇 번을 곱씹어 읽으며 내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고교 졸업식 이후, 새아버지와는 영영 연락이 끊겼습니다. 어머니는 그와의 사 년을 잊은 듯 평소 무심했지만, 때때로 옷장 위에 올려둔 사진첩을 들추며 사색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어머니, 뭐 하세요.”

제가 다가가면, 그녀는 깊은 꿈에서 헤어나온 사람처럼 노곤한 얼굴로 나지막이 묻습니다.

“재하야, 니는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나?”

돌아가고 싶은 순간.

그 물음에 왜 중국 냉면이 생각났던 것일까요. 입안에 감돌던 독특하지만 시원한 식감. 땅콩 소스의 묵직하고도 복잡다단한 맛. 새아버지와 처음 만난 중식당의 생경하면서도 포근한 공기. 자기 몫의 땅콩 소스를 덜어 나의 그릇에 듬뿍 얹어주던 기하 형.

마음속에 아릿하게 감도는 감각과 감정을 애써 기억 뒤로 묻어두며 어머니에게 답합니다.

“저는 없어요.”

어머니는 그러냐며 가만히 웃고는 자리를 뜹니다.

그녀가 돌아가고 싶은 순간은 언제인지 저는 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듣지 않아도 들은 것처럼 가슴이 무지근해지는 건 왜일까요.

홀로 남아 사진첩을 넘겨 봅니다. 반만 채워진 사진첩의 마지막 장에 어머니와 새아버지, 그리고 제가 한 프레임에 담긴 사진이 보입니다. 셋이 함께 찍은 사진은 그것이 유일합니다.

사진 속에서 새아버지는 저와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 손을 맞잡은 세 사람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버티지 못하고 놓아버린 것들, 가중한 책임을 이기지 못해 도망쳐버린 것들은 다 지워지고, 그 자리에 꿈결같이 묘연한 한여름의 오후만이 남습니다.

이편에서 왔다가 저편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것들.
어딘가 숨어 있다 불현듯 나타나 기어이 마음을 헤집어 놓는 것들.

-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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