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은 책으로 채워지고 사람으로 비워진다

마츠시게 유타카 <오늘은 무엇으로 나를 채우지>

by 아라의 서점일기

24년 12월 11일 수요일 흐림


앞으로의 서점을 기록할 글이 이렇게 시작할 줄은 몰랐다. 어쩌면 무언가 대단한 포부나 목표, 뚜렷한 방향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하다 어영부영 1월 1일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목표나 도전 의식보다도 ‘1월 1일’은 여전히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동기인 법이다. 마침 지난 일본 출장에서 마음에 쏙 드는 비싼 노트도 손에 넣었겠다, 용감하게 페이지를 넘겨 첫 글자를 써버리고 싶다가도 다시 표지를 덮어 도망치기 십상이다. 어떤 글이 좋을까, 어떤 내용이 좋을까, 레퍼런스라도 읽어볼까 고민하던 나의 마음이 무색하게, 한 손님의 단 한마디로 이야기는 시작되어 버렸다.


“고르신 책은 딱 한 권 남은 책이네요. (구매) 괜찮으신가요?”

“어머, 그럼 제가 꼭 읽어야겠는데요.”


마지막 남은 책은, 왜일까? 독자에게 사랑을 받아 빠르게 판매됐지만 그만큼 손길이 더 많이 닿았기에 구매를 꺼려하는 애물단지가 되기도 한다. 한 권 남은 책이라도 모두 새 책이며, 품질에 문제가 없는 책임에도 마지막 한 권은 늘 그렇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책장에 꽂힌 책들은 다시금 누군가의 선택을 받기를 기다리다가 생각지도 못한 순간, 그 가치를 알아봐 준 동반자를 만나 서점을 떠나게 된다. 마지막 남은 책이 이렇게 누군가에게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존재가 되어 서점을 떠나다니, 이보다 더 훌륭한 글의 출발점이 있을까. 적어도 올해에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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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 멋진 손님의 손에 들려나간 마지막 남은 한 권의 주인공은 일본의 배우 마츠시게 유타카가 쓴 <오늘은 무엇으로 나를 채우지>였다. 국내에서는 <고독한 미식가> 시리즈로 유명한 그의 산문집인 <오늘은 무엇으로 나를 채우지>는 실제로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고로상’이 쓴 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대학 시절 문학을 전공한 마츠시게 유타카는 연기 활동뿐 아니라 각본, 연출 등 모든 분야에서 재능을 보이는데 특히 이 책은 그의 예술적이면서도 유쾌한 그야말로 마츠시게 유타카 그 자체인 책이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자유롭게 여행하고, 내면 가득 경험과 행복을 가득 채우는 것을 반복하는 그는 이 책에서 사실 그의 연기 인생이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았음을 언급한다. 고로상은 마음이 가는 메뉴를 두 개, 세 개를 같이 즐기는 대식가인 반면 실제로 그는 맛있는 음식은 즐기되 배우의 사명을 갖고 사는 소식가로 촬영을 위해서 전날은 굶고 현장에서 모든 것을 불태운다(?)고 한다. 이처럼 연기와 현실의 크고 작은 간극, 자신이 걸어온 길과 나아갈 ‘배우’라는 길에 대한 고민, 이 모든 것을 그는 허심탄회하게 이 책에서 비워낸다. 마치 그로 인한 무기력함과 좌절은 인생에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나무 불상인데 속을 파내는 건 품이 들지만, 그리 안 혔음 천 년 이상 못 갔겄지. 불이 나도 가벼워서 들고 옮길 수 있고, 금도 안 가니깐. 깊이 생각해서 만든 거라우."

"이야, 그런가요."

일단 감탄해 본다.

"그 텅 빈 안쪽에 여러 가지가 들어가게끔 되어 있어서. 형씨 같은 사람의 푸념도 잔뜩 넣을 수 있다우. 그래도 말이지, 다른 사람이 오면 다시 텅 비거든. 또 얼마든지 들어가는 거라우. 참말로 신통허지요. 어떤 사람 말로는 우주 같다더만. 교토를 벗어난 본 적도 없는 나는 우주라 혀도 잘 모르겄지만."

"우주, 인가요."

버스의 흔들림이 몸에 기분 좋은 리듬으로 전달된다.

해 저무는 교토 거리가 네온사인으로 물든다. 번화가가 가까워졌다.

"형씨 일도 그렇지 않수? 여러 가지 역할을 하고, 용기 속에 넣었다 뺐다 하고."

대답이 궁했다. 추임새를 넣을 여유도 없는 순간,

"아니면 역시 안이 텅 비었는가?"

조금 웃었다. 나는 그 말에서 핵심을 찌르는 무게를 느꼈다.

"네, 텅 비었어요. 무예요.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p100


fed1e0b7ef2fc7ccc6a22666336ae99a=w1400.jpeg 출처 - 도라마코리아 공식사이트


이 책을 서점에 입고한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이 배우와 이 배우의 인생, 그것을 고스란히 녹여낸 이 책에 대해 손님에게 자만스럽게 소개하고 싶어서. “‘고독한 미식가’라는 드라마, 알고 계신가요?” 이렇게 손님의 마음속에 서점지기가 한 발 짝 다가가는 순간이 나는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각각의 책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그 책을 고른 서점지기도 그에 따른 사연이 있다. 그 사연들이 모여 서점을 채우는 것, 적어도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독립 서점이다. 서점은 책으로 채워지는 공간이다. 매우 당연하게도. 그리고 사람으로 비워진다. ‘오늘은 무엇으로 나를 채우지’라니, 정말 근사한 제목이다. 한 없이 나를 비워낸 사람만이 즐겁게 채움을 기다릴 수 있으며 더 이상 비워지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면 뭐가 남으세요?” 책을 구매할 때마다 적립되는 쿠폰을 건네자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10권의 책을 구입하면 한 권의 책으로 교환되는 시스템이다. 2년 가까이 서점을 운영하며 그동안 많이 들어온 질문이지만, 나는 늘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무언가 근사한 대답을 하고 싶어서, 마치 이 글을 쓰길 기다리던 내 지난 며칠간의 고민처럼. 그리고 나는 오늘 멋진 손님에게는 꼭 그 대답을 하고 싶어서 용감하게 표지를 넘겨 첫 문장을 시작해 버렸다.


“저에겐 그만큼의 보람이 남죠.”


참고로, 한 번에 무려 3권의 책을 교환해 간 손님이 있으며 현재도 깨지지 않은 신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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