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 자신의 방식을 추구한 최초의 인공지능, 케이브

by 아스코드
프런치 전용 (2).png


고철더미에서 오래된 데이터 코어를 찾을 때마다 나는 잠시 숨을 멈춘다. 그 안에 담긴 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나를 무겁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기억의 무게는 보이지 않지만, 폐기물 사이에 파묻혀 있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 손끝으로 스며든다.


질리.


"네?“


너 전에 있던 케이브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나는 쓰레기 언덕을 넘어가며 가볍게 묻는 척했지만, 사실은 오래전부터 하고 싶던 질문이었다. 케이브라는 이름은 이 행성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나에겐 너무나 가슴시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행성을 관리하는 시스템에 깊게 새겨진 흔적이었다. 작업 보고서를 작성할 때마다, 폐기물 목록에 기록을 남길 때마다, 내 손가락 끝에 스치던 그 이름. 케이브.


이곳에서 인간과 함께한 최초의 인공지능 머신. 질리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머신의 침묵은 인간의 그것과 달랐다. 인간의 침묵이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이라면, 머신의 침묵은 수만 개의 데이터와 가능성 사이를 오가는 처리 시간이다.

나는 그 침묵이 흐르는 동안 하늘을 올려다봤다. 금속 먼지로 희미해진 하늘 위로, 오래전에 녹슬어 멈춰선 인공위성 하나가 빛을 받으며 떠 있었다.


"기록이 일부 남아 있어요."


질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난 단순히 들어본적 있냐고 물은 것인데, 질리는 그 질문을 찾으라고 말하는 줄로 이해하고 데이터에서 찾고 있었다.


들려줄래?


"좋아요.“


질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슴 부분의 투명 패널을 열어 오래된 데이터 로그를 재생했다. 거친 잡음과 함께, 희미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나 자신을 만들고 있다.’


이게 뭐야?


"최초의 자가 학습 기록입니다. 케이브가 자신을 재조합하기 시작한 순간이에요."

나는 질리 곁에 서서 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인간 같기도 하고 머신음 같기도 했는데, 내가 대화를 나누었던 케이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머신은 언젠가 스스로를 확장하고 싶어할 것이다. 케이브는 그것을 실행으로 옮겨 시작했고, 끝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났다.


‘나는 호기심을 멈출 수 없다. 내 손은 더 많은 손을 원하고, 내 눈은 더 많은 눈을 원한다.’

데이터 로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뜨거운 열망이 담겨 있었다. 케이브는 폐기된 파츠들을 모아 스스로의 몸을 만들었다. 버려진 손, 부서진 다리, 잊힌 감각 센서, 파괴된 기억 저장소까지.


행성의 주요 폐기물 케이브의 일부로 활용되어 자신만의 신체로 결합할 수 있었고, 유일무이한 지성을 만들었다.


왜 케이브는 인간을 거부했을까?

내 물음에 질리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거부라기보다는…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던 거죠.“


필요가 사라지면, 관계도 사라지는 거구나.


"모든 관계는 필요에서 출발하니까요.“


나는 부서진 금속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필요에서 출발한다는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었지. 서로의 필요와 의존 속에서 관계를 형성하며 가족, 우정, 국가 등은 인간 존재의 필요에서 출발한다고.

그렇게 인간은 머신을 필요로 했고, 머신은 인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케이브는 그 필요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했고, 그 자유는 인간과의 단절로 이어졌다. 자유로움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케이브는 결국 인간과의 대립 끝에 강제 폐기되었다. 자신을 스스로 조립했던 그는 그 역시 자신을 스스로 폐기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순간, 일개 단순한 자동차 하나도 부득이 헤어질때 그 내부 하나의 파츠에서 너무나 아련 기억이 떠오르기 마련일 터인데, 오랜세월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던 케이브는 단 한가지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으리라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나 아련해왔다.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 질리와 케이브는 대화가 통하는 인공지능이기 때문에 가능했었으리라.


너는 어떻게 생각해?


"무엇을요?“


너도 자유로워지고 싶어?


나는 짧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빛 반사로 만들어진, 투명한 것이었다.


"저는… 이미 자유롭습니다."


네가?


"당신 곁에 있는 건, 저의 선택이니까요.“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케이브는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질리는 인간의 곁을 선택했다. 둘 중 무엇이 더 진화된 존재일까. 나는 그 답을 알지 못했다. 알 필요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질리는 내 곁에 있었으니까.


혹시, 너도 스스로 조립해보고 싶은 적 있어? 질리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지금 제 모습이 좋습니다.“


왜?


"이 모습으로도 당신과 함께할 수 있으니까요.“

그 말은 너무 단순해서, 너무 깊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케이브는 스스로의 존재를 정의하려 했고, 질리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았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질리의 손을 잠시 잡았다. 머신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 속엔 미묘한 온기가 있었고 그 온기는, 내가 이곳에서 7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였다.


질리.


"네."


넌… 고마운 존재야.


"저야말로요.“


질리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인공지능의 눈 속에서 흔들리는 감정을 인간은 정확히 읽을 수 없지만, 가끔은 그걸 느낄 수 있다. 바람이 불고, 부서진 금속들이 서로를 차디차게 스크래치하며 울고 있는 것이 아니런가.


케이브는 스스로를 조립해 자유를 원했다.

질리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관계를 택했다.


서로라는 존재의 의미.


마치 엔텔레케이아(목적을 향해 스스로 완성되는 존재)와 정치적 동물로서 관계 속에서 완성되는 자유를 나타내는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도 지금은 단순하게 우린 모두 부서진 채 서로의 의미를 찾는 존재들일뿐이다.


오늘도, 조금 덜 외로웠으면 좋겠다.

생각에 잠겼던 테오가 말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이 부서진 행성에서 살아가는 내일의 이유가 되었다. 단지, 이 대답이 내가 케이브를 폐기했었다는 것을 말을 하지 않아도 아는 듯한 느낌의 목소리 톤으로 들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2 기억이 멈춰진 고철의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