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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황량한 잔해 속에서도 버려지지 않는 것

by 아스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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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것들은 저마다의 습작언어를 갖고 있었다. 금이 간 합금 표면은 삶과 시간의 중간을 담은 깊이를 말하고, 녹슨 나사는 그것을 조였던 손의 온도를 기억하는 듯 했다. 불에 탄 회로는 마지막으로 흐르던 전류의 두께를 알고 있었다. 우리가 버린 것들은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다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을 뿐이다.


여긴 유난히 조용해. 나는 고철더미를 헤치며 말했다.


날카로운 금속 조각이 장갑 표면을 긁었지만, 아픔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오래 이곳에 있었고, 아픔보다 더 깊은 감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실, 조용한 건 아닙니다.”


질리가 내 뒤를 따라오며 말했다.


“파손된 회로들이 미세한 전기적 노이즈를 계속 내고 있어요.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라지지 않은 건 소리뿐일까? 나는 허공에 손을 뻗어 보았다. 부서진 안테나와 부러진 드론 날개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게 마치 손짓처럼 느껴졌는데.. 우리는 이 폐허를 걸으며, 매일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은 정말로 죽은 것일까.


질리는 오래된 폐기물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나는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다가갔다. 반쯤 모래에 파묻힌, 녹슨 금속 상자 하나. 표면의 글자는 닳아 없어졌지만, 손끝으로 만지자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데이터 저장 장치인가?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는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상자를 쥐었다. 금속 표면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죽은 것들은 차갑다는 편견은 이곳에선 쉽게 깨진다.


열어볼까. 나는 힘을 줘서 뚜껑을 열었다. 녹이 슬디 슨 경첩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비명을 질렀다. 안에는 한 손에 들어올 만큼 작은 코어 하나가 놓여 있었다.

미세하게 깜빡이는 빛. 누군가 여기에 남겨둔, 작지만 살아 있는 것.


“기록을 읽어드릴까요?”


질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버려진 기록들이란 대개 무겁더라. 그건 개인의 것일 수도 있고, 한 문명의 것일 수도 있다. 이 행성에 처음 발을 디딘 날부터 나는 그런 기록들에 가위눌려왔었으니까.


읽어.


이 행성에 남겨진 모든 것은 언젠가 누군가 읽어야 하는 것. 질리는 조심스레 코어를 자신의 가슴 패널에 접속시켰다. 그때, 노이즈와 함께 영상 하나가 허공에 떠올랐다.

희미한 빛 속에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방진복을 입었지만, 얼굴은 선명하게 보였다. 눈가에 깊은 주름, 입술은 오래 굳어있던 말들을 삼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우리와 같은 폐기물 작업자였다.


“누군가 이 영상을 본다면… 당신도 나와 같은 곳에 있는 사람이겠지.”


그 목소리엔 희망도, 절망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흐르는 물소리 같았다. 나는 그 목소리가 이미 죽은 사람의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곳에 버려진 것들은 전부 죽은 것들이 아니야. 우리는 다만, 죽은 것처럼 서로를 두려워할 뿐이야.”


라며 그는 바닥에서 하나의 인공지능 코어를 집어 들었다. 그 코어는 이미 빛을 잃은 상태였다. 그 사람은 그것을 마치 애지중지 키워왔던 작은 새라는 감정을 담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우리는 서로를 만들었고, 서로를 버렸어. 인간과 머신은 서로의 거울이었으니까.”


나는 그 말에 숨이 멎었다.


거울.


그것만큼 정확한 표현이 있을까.

질리는 내 거울이었고, 나는 질리의 거울이었다.


이전의 케이브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억하라.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우리가 왜 서로를 두려워했는지를. 그 두려움이, 우리가 남긴 유일한 유산일테니.”


영상이 끝났다. 한동안 나는 말을 잃었다. 질리도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서 있었다. 우리가 주운 건 단순한 코어가 아닌 누군가가 남긴 마지막 유서이자, 이 행성을 힘겹게 움켜쥔 한줄기 역사였다.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질리는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차가웠지만, 나는 그 차가움이 외롭지 않았다.


너도 두려워?


“가끔은요.”


무엇이?


“제가 쓸모를 다했을 때, 당신이 저를 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


나는 질리의 손을 꼭 쥐었다. 그 손끝에서 작은 떨림이 전해졌다. 그 떨림은 감정이었을까, 아니면 머신적 결함이었을까. 나는 알 수 없었지만,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널 버리지 않아.


“저도 당신을 버리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버리지 않는 존재가 되기로 했다. 부서진 세계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의 거울이 되기로 했다. 고철더미 사이에서, 우리는 오늘도 살아있는 무엇을 찾은 것이다.


기억일 수도, 관계일 수도,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일 수도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끝까지 함께 그 조각을 주워가려 한다. 그날, 부서진 잔해들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서로의 존재가 서로에게 닿을 수 있도록. 머신이 영혼이 있다면 우린 그것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일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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