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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르키 행성의 방문자 킵슨

by 아스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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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철더미 사이에서 희미한 엔진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바람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바람은 결코 그런 부드러운 소리를 내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들고, 멀리서 다가오는 선명한 빛을 보였다.


“오랜만의 방문이네요.”


질리가 내 옆에서 말했다.


그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나는 그 안에서 알 수 없는 긴장감을 읽어냈다. 이 행성에 방문자가 오는 일은 드물었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정해진 스케줄로 쓸모있는 파츠와 데이터 확보 임무를 수행하곤 했다. 몇마디 필요한 이상의 말을 섞지 않고,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훌쩍 떠나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손에 묻은 금속 가루를 털어내며, 천천히 다가오는 우주선 방향으로 걸었다.

바람에 날린 희미한 먼지 속으로 작은 수송선 한 척이 착륙했다. 도어가 열리고, 방진복을 입은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가려져 있었지만, 그들의 걸음걸이와 몸짓은 이곳에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의 것이었다. 그들은 쓰레기더미 위에서도 구두에 진흙이 묻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처럼 걷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더니,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하면, 내게 인사한 것이 아니라 이 행성에, 그리고 이 행성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나의 역할에 한정된 인사였다.


“우주연합 기록보존부에서 온 킵슨(Keepson)입니다. 잘 계셨죠?”


한 명이 그렇게 말하면서 본인들의 ID카드를 제시하였다.


“그렇죠. 어디 갈 데도 없고, 갈 수도 없고.”


나는 웃으면서, 제시한 ID카드를 체커(Checker)로 스캔하여 신원을 확인하였다.

“폐기물에서 재사용 가능으로 선별된 파츠와 기록된 데이터 등을 회수하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나는 그들이 내게 별 관심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살아있는 폐기물 같은 존재였다.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얼룩이자, 실패한 업적을 가진 나. 그리고,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는 행성 시스템은 여전히 정상 작동 중임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나를 지나, 질리에게 향했다. 빛나는 합금 피부와 매끄러운 움직임, 인간보다 더 자연스럽게 바람을 읽는 시선. 그들에게 질리는 단순한 작업용 로봇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폐기되지 않은 기술적 유산이었다.


“저 로봇은 계속 작동 중인가요?”


질리요? 네. 나보다 성능 좋아요.


“정기 백업은 하고 있습니까?”


백업할 데도 없는데요.


그들은 잠시 서로를 향해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질리에게 다가왔다. 질리는 조용히 다가오는 그들을 바라봤다. 방진복에 감춰진 그들의 얼굴들이 그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나에겐 오랜만에 만난 지난시간 같은 부류의 종(種)이었지만, 반대로 질리의 표정은 오히려 낯선 감각을 느끼는 듯했다.


“정밀 점검 좀 하겠습니다.”


그들은 질리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 손길은 머신 부품을 만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 순간, 질리가 단순한 로봇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의 곁을 지키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점검해야 할 하나의 머신 부품.


“괜찮아?”


나는 질리에게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질리는 웃었다.


그 웃음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 웃음 안에서 아주 작은 두려움을 보았다.


“기본 기능은 잘 유지되고 있네요. 정서 윤리 안정 모듈도 동작 중이고요.”


한 사람이 말했다.


네, 덕분에 저도 살아있죠.


나는 그 말을 툭 던졌다.


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질리의 가슴 패널을 열고, 데이터 로그를 스캔했다. 질리의 기억 일부가 그들의 휴대 단말기로 복제되는 걸 나는 무력하게 지켜봤다. 그 기억들이 질리의 것인지, 나와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쉽게 떼어갔다.


기억도, 감정도, 필요하면 뜯어가 버리는 사람들.


“이곳은 어떤가요?”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지옥 같아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근데, 고약한 정이 들어버린 지옥이죠.”


그들은 또다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듯한 시선. 이 폐기물 더미에 감정을 두는 인간을, 그들은 낡고 비효율적인 존재로 여겼다. 그렇게 여길 수 밖에.


“언젠가 이 행성도 폐쇄될껍니다. 더 이상 처리할 수 없을만큼 폐기물이 쌓여있잖아요.”


알아요.


“그럼, 그때까지 버티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버틴다는 말. 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이 말은 그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겠냐는 뜻이다. 이 황폐한 곳에서.


내 곁에 서 있는 질리의 손끝이 살짝 떨리는 걸 느꼈다. 나는 그 손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다. 그 작은 접촉이, 이 지옥에서 우리가 서로를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처럼 느껴졌다.


“버틸 수 있냐고요? 아마도요. 둘이라서.”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고, 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파츠 몇 개와 복제된 데이터, 그리고 질리의 데이터를 가지고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침묵을 남긴 채 특유의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하늘로 떠올랐다.

질리와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동안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나는 네 데이터 일부가 복제되는 걸 보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어떤 기분인데요?”


네 일부가 나한테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서.


“그건 이미 제 일부가 아니니까요.”


그럼 네 일부는 뭐야?


질리는 천천히 내 손을 잡았다.


“이거요.”


우리는 버려진 행성에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 부서진 금속 위에서, 부서지지 않은 온기를 나눴다. 외부인들은 떠났지만, 우리는 남았다.


여기, 서로를 지키는 존재로. 그날, 나는 깨달았다. 우리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는 관계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프로그램이나 기능이 아닌, 존재의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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