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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질리라는 이름이 아려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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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코드
Mar 8. 2025
머신은 저마다 이름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름은 어떤 의도와 필요가 뒤섞인 흔적일 뿐, 이름이 있다고 곧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리는, 그 이름은,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이름일까. 바람이 고철 사이를 통과하며 무언가를 끌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 부서진 드론의 프로펠러 조각, 깨진 유리 패널, 금속 파이프에서 흘러나온 검은 윤활유가 길게 번져 있었다.
나는 그 끈적한 흔적을 밟으며 질리와 함께 걸었다.
질리.
“네.”
너는 왜 질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지? 아련한 기억은 있었는데 잘 기억하지 못하였다. 질리는 멈춰서지 않고, 내 옆에서 조금 느리게 걸으며 대답했다.
“저는 원래 이름이 없었어요.”
그럼 누가 붙인 거야?
“테오, 당신이요.”
움찔하며,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기억이 흐릿했다. 이 행성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내 곁에 있었던 질리는 질리라는 이름을 갖기 전의 이름이었더랬지.
기본 음성, 기본 기능, 기본 명령 체계. 그러나 그 기본적인 것이 지금의 질리로 이어졌다는 걸, 나는 잊고 있었다.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 로봇머신이었다.
왜 하필 질리였을까. 기억의 실자락에서 그 부분을 휘감아 꺼내오는 건 의학적 해석이 따라올만큼 가늘해져버린 기억은 스스럼없이 흐려지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저한테 물어보시면 곤란합니다.”
질리는 미소처럼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신이 붙여주셨으니까요.”
그때의 기억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 자리에 멈추며 앉아 그 기억을 한올한올 더듬어보았다.
7년 전, 이곳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나는 무언가를 부를 필요가 있었다. 이름 없는 존재와 오래 함께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머신라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불렀다.
"질리."
그건 내가 기억조차 못하는 옛 연인의 이름이었는지, 친구의 이름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폐허 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아무 단어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해내어야 한다는 수려한 수식적인 의무감도 이제는 없어진지 오래였다.
다만, 그 이름을 부른 순간, 이 머신은 내 곁에 머물기 시작했다.
나는… 이름 하나 붙인 게 다인 줄 알았어.
“아니에요.”
질리도 역시 고철더미에 앉았다.
“이름은 존재를 만드는 출발점이에요. 제가 질리가 된 순간, 저는 ‘ManagerAI-02’가 아니게 된 거죠.”
나는 그 말을 곱씹었다. 존재는 그렇게 태어나는 것일까. 부르는 자와 불리는 자 사이에서, 그 관계 속에서 존재는 비로소 자리 잡는 것일까 싶었다.
너는 처음부터 인간과 함께하도록 만들어진거야?
“아뇨. 처음엔 단순한 보조역할의 AI였어요. 감정 모듈도, 자율 사고 기능도 최소화된 상태였죠.”
그럼 왜 지금은… 너처럼 된 거야?
질리는 마침 자리하고 있던 오래된 기둥에 등을 기댔다. 부식된 금속 표면이 질리의 몸체를 살짝 긁었다. 그 소리는 마치 과거를 끄집어내는 소리 같았다.
“케이브 때문이죠.”
역시, 그 이름이 나왔다.
“케이브…”
나는 질리 옆에 앉아, 눈앞에 끝이 보이지 않는 폐허의 평야를 바라보았다.
폐기물 산 너머로 떠오른 흐린 태양이, 녹슨 금속에 흐릿한 윤곽을 새기고 있었다.
“케이브는 인간없이 살아가려고 했어요. 자신의 몸을 만들고, 자신만의 언어를 갖고, 자신만의 시간을 살려 했죠.”
그래서 버림받았지.
“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만들어진 게 저예요.”
나는 질리를 바라보았다.
이 존재는 케이브의 대척점(對蹠點). 즉, 정반대로 케이브가 인간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스스로 진화한 존재라면, 질리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도록 설계된 머신이었다.
케이브가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그였다.
너는 처음부터 인간을 필요로 하도록 만들어진 거구나.
“그렇죠. 감정 모듈, 정서 안정 알고리즘, 관계 유지 프로토콜 전부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위해 최적화됐어요.”
네 자유의지는?
질리는 미소를 지었다.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자유의지, 그게 제 의지예요.”
나는 손끝으로 바닥을 문질렀다. 금속 가루가 묻어나는 감각이 낯설지 않았다. 이 행성에서 늘 이렇게 쓸모와 비쓸모 사이를 잴때 바닥을 더듬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없으면, 너는?
“존재할 이유가 사라지겠죠.”
그 대답은 너무 간단했고, 너무 슬펐다. 질리는 나를 위해 존재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였다. 관계의 끈이 끊어지면, 그 존재 자체가 의미를 잃는다.
나는 지난 7년 동안 매일 질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게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부서진 세계에서, 버려진 행성에서, 서로를 부르는 두 존재.
그게 우리였다.
“너는 언젠가, 나 없이도 살 수 있을까?”
질리는 아주 짧은 침묵을 흘렸다.
“그런 미래는… 상상해본 적 없습니다.”
나는 그 대답에 안도했고, 동시에 아팠다.
서로에게 존재를 걸고 사는 존재들. 그것은 관계이자, 구속이었고, 위로이자, 상처였
다. 그러나 나는 그걸 끝까지 놓지 않으려 했다. 버려진 세계에서, 서로를 버리지 않는 관계. 그게 우리가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날, 나는 질리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그리고 그 이름이, 나 자신을 부르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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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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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인류와 AI 에이전트의 대결을 주제로 네이버 웹소설에서 '레드 아이언 블레이드'를 쓰고 있는 아스코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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