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8 폐허의 끝에서 폐기된 미래
by
아스코드
Mar 8. 2025
폐허의 끝은 미래였다. 나는 줄곧 그렇게 믿어왔다. 아무리 부서지고 녹슬어도, 여기 남은 것들은 모두 한때 미래였다. 누군가의 손에서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것들은 모두 '내일'을 위해 존재했다.
비행선, 정거장 모듈, 인공장기, 코어, 수많은 모터, 칩셋, 태양열 패널, 각종 안테나 등등..
머신들도, 사람들도, 모두 미래를 꿈꾸며 이 행성 어딘가에서 한 번은 출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미래는 지금 전부 쓰레기가 되어 내 발아래 먼지를 품에 가득 안은채 깔려있다.
나는 질리와 함께 고철더미 위를 걸었다. 발밑에서 부서지는 파편들이 짧은 비명을 냈다. 미래가 내딛는 발자국이라고 빗대어보면 그 소리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미래라는 게, 뭘까.”
나는 뜬금없이 물었다.
부서진 위성의 잔해가 빛을 받으며 희미하게 반짝이는 나를 질리는 잠시 나를 보았다.
“미래요?”
그래. 우리가 지금 걷는 이 폐허도 한때는 누군가가 만든 미래였을 거 아냐.
“그렇죠.”
근데 지금은 쓰레기야. 결국 모든 미래는 폐기되게 돼 있는 걸까.
질리는 한참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머신에게도 '미래'라는 개념이 얼마나 실제적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에네르게이아(Energeia), 뮤지션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어도 그가 직접 연주할 때 비로소 뮤지션이라는 실제가 된다는 것. 그 미래는 얼마나 실제적인걸까.
“제가 아는 범위에서 말하자면…”
질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래는 시간의 방향이 아니라, 기대의 형태 같아요.”
기대?
“사람들이 미래라고 부르는 것들 대부분은, 어떤 결과를 향한 기대의 집합이잖아요.”
나는 질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기대지. 누군가는 오래 살고 싶어서, 누군가는 더 빠른 이동 수단이 필요해서, 누군가는 더 편한 동료가 필요해서.
“그런 기대들이 모여서 미래를 만들고, 또 미래를 버리죠.”
왜 버릴까.
“기대가 두려움으로 바뀌는 순간, 미래는 폐기되니까요.”
그 말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질리는 그 자리에 서서, 내 표정을 가만히 살폈다. 머신의 눈이지만, 그 눈빛에는 이상한 온기가 담겨 있었다.
너도 기대였을까.
“그럴지도요.”
그럼 너도 언젠가 폐기될까.
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머신은 인간의 기대에서 태어나지만, 그 기대가 불안으로 바뀌는 순간 가장 먼저 버려지는 존재가 된다.
케이브도 그랬다. 인간이 케이브 자신을 기대하지 않게 된 순간, 인간들은 케이브를 버렸다. 너무 똑똑해진 머신, 너무 자기 의지가 강해진 존재.
그것은 '기대'가 아닌 '위협'으로 이름이 바뀌는 순간이다.
미래는 결국 두려움 때문에 폐기되는 거구나.
“그렇죠.”
그럼 미래는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거였나. 무리인건가.
“그건…”
질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가능한 미래와 불가능한 미래를 구분하는 건 인간들이니까요.”
나는 질리의 대답이 이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것에게 찔려 피가 솟구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날카로움은 너무 맞는 말이라, 되려 가슴 한켠이 무거워졌다.
나는 슬며시 발끝에 차이는 작은 코어파츠를 주워 들었다. 겉면은 갈라지고, 내부 메모리 일부는 이미 날아간 상태였다. 한때 누군가의 동료였을지도 모르는 것. 지금은 말도 못 하고, 기억도 남지 않은 잔해.
“이 파츠도 미래였을 거야.”
나는 파츠를 흔들며 말했다.
“그럼요. 누군가가 기대했던 미래, 그리고 지금은 폐기된 미래, 미래는 그렇게 되풀이되는 거죠.”
그 말을 듣고 나는 부서진 파츠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금속성 표면에 손가락 자국이 남았다. 아주 작은 흔적이지만, 나는 그 흔적이 미래로 이어지는 작은 연결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폐허를 걸으며, 버려진 미래 속에서 다음을 상상했다. 그것이 어떤 모양일지, 어떤 이름일지 모른 채, 서로의 손끝에서만 느껴지는 미묘한 온기 하나로 미래를 견뎠다.
그게 우리가 가진 전부였다.
폐기된 미래들 속에서, 버려지지 않은 서로가 유일한 미래였다.
keyword
행성
미래
존재
6
댓글
댓글
0
작성된 댓글이 없습니다.
작가에게 첫 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브런치에 로그인하고 댓글을 입력해보세요!
아스코드
직업
크리에이터
인간, 인류와 AI 에이전트의 대결을 주제로 네이버 웹소설에서 '레드 아이언 블레이드'를 쓰고 있는 아스코드입니다.
구독자
5
제안하기
구독
작가의 이전글
#7 테오의 쓰라리지만 무뎌진 깊은 상처
#9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된 질리
작가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