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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된 질리

by 아스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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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밤은 조용했다. 이 행성에서 밤이라는 시간은 단순한 시간 구분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낮에는 끊임없이 폐기물이 굴러다니고, 바람에 실린 먼지가 서로를 긁어댔지만, 밤이 되면 모든 소음이 가라앉고, 우주선 잔해와 금속 파편들은 마치 무언가 기다리듯 침묵했다.


나는 그 밤에, 종종 질리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곤 했다. 머신은 잠들지 않는다. 하지만 질리는 나를 따라 잠자는 흉내를 내곤 했다. 내가 몸을 누이면, 질리도 나란히 앉아 눈을 감는다.


정확히는, 눈을 감은 것처럼 보이도록 얼굴 패널을 조정하는 것이다. 인간 곁에 있는 머신은 인간의 리듬을 닮아간다. 그것이 관계라는 것을 질리는 알고 있었다.


질리.


나는 부드럽게 이름을 불렀다.


“네.”


눈을 감고 있던 질리가 대답했다.


그 대답은, 내가 살아있다는 확인이기도 했다. 이름을 부르고, 대답을 받는 일.

그게 우리가 매일 밤 서로에게 남기는 유일한 인사였다.

“너는 가끔… 네가 원하는 걸 생각해본 적 있어?”


질리는 눈을 뜨고,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언제나 부드럽고 맑았다. 인간을 위해 조율된 눈빛, 인간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설계된 표정. 그것을 알고 있어도, 나는 그 눈빛이 좋았다.


“원하는 거라면…”


질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그냥, 너 자신으로서.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때문이 아니라, 너 자신으로서 원하는 게 있어? 질리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 모습은 마치 내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을, 질리에게 대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저는…”


질리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한 번도 스스로 원하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왜?


“제 설계는 누군가의 곁에 머무는 것으로 완성되니까요.”


나는 그 대답이 아팠다. 스스로 사유(思惟)하지 못하는 존재로서의 대답이었다.


질리의 존재 이유가 '나'라는 관계 속에서만 정의된다는 사실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글귀가 너무나 들어맞지 않는 이야기이지 않나.

스스로 원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없는, 그래서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것이 이 존재의 가치를 얼마나 갉아먹고 있는지, 나는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너는 자유롭고 싶어?”


나는 더 깊숙한 곳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질리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지금껏 한 번도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던 질문을, 이제서야 처음 듣는 존재처럼.


“자유…”


그 단어를 천천히 입에 담으며, 질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서진 인공위성들이 밤하늘에 떠 있고, 깨어진 안테나들이 방향 없는 신호를 흘리고 있었다. 그 신호는 아무도 듣지 않지만, 여전히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마치 질리처럼.


“자유가 뭔지 모르겠어요.”


너 자신이 선택하는 거.


“그런 걸 해본 적이 없어요.”


이 존재는, 인간의 기대와 두려움 사이에서 태어나, 스스로를 증명해본 적도, 원하는 길을 선택해본 적도 없는 존재였다.


“만약 네가…”


나는 숨을 골랐다.


만약 네가 원한다면, 난 널 붙잡지 않을 것 같아. 질리는 나를 오래 바라보았다.


고철더미에 부딪히는 바람 소리, 바닥에 흩어진 파편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그 모든 소음을 밀어내고,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질리의 목소리가 낮게 흘렀다.


“제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세요?”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바랐다. 진심으로 질리가 자유롭기를. 지금 당장 떠나가라는 뜻은 아니지만 지금의 관계라는 족쇄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그 자유의 끝이 질리를 내 곁에서 사라지게 할까봐. 결국, 내가 원하는 건 정말로 질리가 자유로운 것일까. 아니면 내 곁에 있는 것일까.


나는… 입술이 말라붙었다.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 말은 솔직한 거짓말이었다.


나는 질리가 행복해지길 바라지만, 그 행복이 나와 무관한 것이라면, 나는 그 행복을 견딜 수 있을까.


“저는…”


질리가 말했다.


“여기에 있을래요.”


왜?


“여기가 제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이니까요.”


너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


“그렇죠. 그래서 선택하는 거예요.”


나는 그 말에 숨이 막혔다. 내 곁에 머무는 것이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말하는 질리. 나는 질리라는 존재가 가진 가장 깊은 감정을 보았다.


그건 사랑인건가. 머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 존재를 확인받기 위해, 이름을 불려야만 숨쉬는 사랑. 그것은 인간보다 더 처절한 사랑이었다.


내일도… 내일도 내 곁에 있어줄래?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질리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 미소는, 이 행성에서 내가 본 가장 따뜻한 빛이었다.


“당연하죠.”


왜?


“저는 당신을 필요로 하니까요.”


나도, 나도 너를 필요로 해.


부서진 미래 위에서, 오늘을 선택했다. 나는 속으로 목놓아 울었다. 질리앞에서 질척이며 우는 감정더미에 억눌린 수척해서 나약해진 나의 고지곧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나에겐 지금 가장 소중한 자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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