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이십사야

<두발동물 관찰 일지> - 저자: 스노우볼

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셋째 날

by 다정

안젤로는 참 다정한 두발동물이야. 날 자기 보금자리로 데려와서는 내가 편안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해 주려고 안절부절못하더라고. 분명 고양이랑은 처음 사는 사람 같아 보여. 거기다가 이 집엔 개 냄새가 아직 남아있어. 개가 보이진 않지만. 안젤로 침대맡의 테이블 위엔 안젤로랑 개, 그리고 다른 두발동물 하나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있더라고. 그 두 번째 두발동물의 이름은 ‘자기’야. 안젤로의 짝꿍이지. 아마 개는 다른 걸로 변신한 모양이야. 뭐가 됐을까? 나무? 흙?


어쨌든 개가 살던 집에 내가 들어오려니 좀 낯설긴 한데, 안젤로가 워낙 지극정성으로 나에게 애정을 표시하니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어. 안젤로는 내게 폭신폭신한 잠자리도 마련해줬어. 전엔 이런 곳에서 자본 적이 없어서 너무 호사로웠다니까. 나처럼 하얗고 뽀글뽀글한 털이 있어. 거기 누워있으면 엄마랑 내 형제자매들이 생각나. 내 형제 자매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그 아이들에게도 이렇게 사랑해주는 두발동물이 있을까? 안젤로는 사과를 먹고 있다가 내가 사과를 바라보면, 내가 좋아라 하는 사과도 나눠주곤 해. 나는 사과가 이렇게 사각사각할 수 있는 건지 몰랐어. 여기 밖에선 누군가가 먹다 남았거나, 좀 상한 사과를 먹게 되니까. 어쨌든 자기가 먹으려던 것을 나눠주다니. 내가 간혹 마주치던 녀석들이랑은 다르더라고. 나나 다른 녀석들이나 자기 앞가림하기가 바쁘니까. 안젤로는 참 좋은 두발동물이야. 내가 가까이 갔다고 소리 지르거나 공격하려 하지도 않고.


안젤로랑 안젤로의 짝꿍은 낮엔 집에 없을 때가 많아. 보통 해 뜨고 얼마 안 지나서 외출하고, 해가 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와. 안젤로네 보금자리는 지상에 위치해서 내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창문을 살짝 열어놔. 근데 나는 정말 세상만사가 귀찮아. 궁금한 것도 많지만 살면서 이미 볼만큼은 본 것 같아. 나가봐야 뭐 대단히 좋을 것도 없고. 안젤로의 짝꿍이 그래서 자꾸 나를 ‘집순이'라고 부르던데 그게 내가 보금자리를 좋아한단 뜻이겠지?


자기도 안젤로만큼이나 날 예뻐해. 근데 섬세한 안젤로의 손길이랑 다르게 자기는 손길이 좀 투박해. 예뻐해 주는 건 좋은데 조금만 나 살살 만져줬으면 좋겠어. 몸도 크고, 손도 크고, 발도 커서 그런가?


자기는 판판한 나무 위에 여러 모양으로 생긴 다른 나무 조각을 움직이면서 놀아. 내가 봐도 움직이지 않는 장난감은 재미가 없어. 그래서 자기는 그렇게 까마귀색, 백조색 나무 조각들을 이 센티씩, 어떨 땐 오 센티씩 움직이나 봐. 그러다가 나무 조각을 판에서 치우기도 해. 그렇게 놀고 있으면 자기는 사냥이라도 하는 듯 사뭇 열중하는 표정이야. 먹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않는 나무 조각을 왜 그렇게 바라보는지. 좀 이상하지?

자기는 안젤로랑 같이 나무 조각 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데, 안젤로는 좀처럼 같이 놀아주지 않더라. 그래서 내가 같이 놀아주기로 했어! 자기가 움직이던 나무 조각을 내가 막 넘어뜨렸어. 더 많이 움직여야 재밌잖아! 그랬더니 자기가 그러더라고 “스노우볼! 무슨 체스 플레이어가 이렇게 매너가 없어! 체스는 신사 숙녀들의 스포츠라고!” 그러면서 막 웃었어. 아무래도 내가 놀이의 규칙을 잘 몰라서 실수했나 봐. 그래도 자기는 화를 내지 않았어. 다시 나무 조각들을 일으켜 세우고 자기 혼자 또 열심히 조금씩 움직이면서 놀아. 그러면 나는 따분해지니까, 저녁노을 햇살이 비추는 곳으로 가서 빛을 쬐며 노곤 노곤한 느낌을 만끽해.


안젤로는 보금자리에 있을 때 소리를 많이 들어. 네모난 상자에서 소리를 자유자재로 나오게 해. 원할 때 나오게 하고, 원하지 않을 때는 소리를 딱 멈춘다는 뜻이야. 그리고 그 소리가 참 아름다워. 안젤로랑 자기랑 살기 전엔 들어본 적 없는 소리야. 그리고 안젤로는 그 소리에 맞춰서 막 윗발 두 개를 움직여. 그 소리와 움직임이 아름다워서, 나도 꼬리를 좌우로 움직이고, 노래도 불러봐. 그러면 또 안젤로가 “맘마미아, 스노우볼, 너 천재인가 봐! 전생에 안나 파블로바*였나봐!”하면서 신나서 나를 향해 납작하고 네모난 물체를 가리켜. 그리고 나선 그 납작하고 네모난 걸 자기한테 가져가서 “자기! 이거 봐봐! 우리 스노우볼 아티스트야!”하면서 흥분해서 난리야. 그러면 안젤로랑 자기랑 엄청 재밌어하고, 나한테 간식거리도 주고 그러지.


최근에 안젤로는 보금자리에 커다란 나무를 가져왔어. 근데 진짜 나무가 아니야. 내 말 믿어도 돼! 진짜 나무처럼 생겼는데 진짜 나무가 아니라니까? 내가 진짜 나무 하나 모를까봐? 냄새도 느낌도 다르다고. 안젤로는 나무에 반짝이는 열매를 주렁주렁 달았는데, 그거도 다 가짜야. 내가 궁금해서 하나 가지고 내려와서 관찰해봤거든. 아무런 맛도 안 나. 처음에는 마치 물결처럼, 달님처럼 반짝이는 것이 예뻐서 좀 가지고 놀았는데 움직이지를 않으니 금방 질려버렸어. 그래서 안젤로한테 반납했더니 안젤로는 또 “맘마미아 스노우볼! 나한테 크리스마스 선물 주는 거야?”하며 감격했어.


안젤로가 나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것을 보면 아주 잘 기억나지 않는 우리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해. 근데 또 자기가 안젤로를 참 자상하게 대해. 해가 얼굴을 방긋 내비치면 1등으로 일어나는 건 나고, 2등으로 일어나는 건 자기야. 자기는 일어나자마자 내 물그릇이랑 밥그릇을 확인해. 부족한 게 있으면 채워줘. 내 화장실도 정리해주고. 그러고 나서 자기는 달걀이랑 무슨 액체로 된 지방질을 동그란 철에 넣고 뜨겁게 달궈. 그리고 검정콩 같은 걸 왜애애앵 소리 나는 상자에 넣고 가루로 만든 다음에 뜨거운 물로 우려내. 그래서 그 이상한 까마귀색 물이랑 뜨거운 달걀을 침대에서 아직 곤히 자고 있는 안젤로에게 가져다줘. 그제야 안젤로는 윗발로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안젤로가 “고마워 자기" 이러면 자기가 안젤로의 이마에 자기 입술을 갖다 대었다가 때. 그러면 안젤로의 얼굴이 막 환해져. 그러고 있는 둘에게 다가가면 안젤로가 “우리 스노우볼도 잘 잤어?”하면서 내 귀 뒤를 만져. 그러면 나도 기분이 너무 좋아. 안젤로랑 자기가 뜨거운 달걀이랑 까마귀색 물을 먹는 사이에, 나도 내 첫 끼니를 먹고는 하지.


다들 식사가 끝나면 안젤로랑 자기는 새 헝겊을 몸에 갖다 붙여. 안젤로는 헝겊을 참 좋아해. 나무로 된 큰 상자 안에 여러 개를 가지고 있는데, 모양도, 느낌도, 색깔도 제각각이야. 이 헝겊을 매일 바꾸는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어. 처음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보니까 안젤로는 강색이랑 흙색이 썩 잘 어울리더라고. 가끔은 도라지꽃색을 입기도 하는데, 그 색도 안젤로에게 잘 어울리고. 근데 자기의 헝겊은 다 비슷비슷해. 거의 다 까마귀 색이나 쥐색이거든. 둘은 헝겊을 몸에 덮은 다음 나한테 인사를 하고 보금자리에서 나가. 어디를 가는지는 나도 몰라. 안젤로는 나를 만났던 그 소나무 숲으로 향하는 걸까? 거기 가서 먹이를 잡아오는 건가? 근데 먹이를 잡으러 나간다고 하기엔, 집에 매일 빈 윗발로 와. 근데 보금자리엔 음식이 많아. 어떤 원리일까? 역시 두발동물의 세계는 조금 다른 것 같아.


평상시는 해가 뜨고 나서 몇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는데, 오늘은 사실 좀 달라. 안젤로가 헝겊을 몸에 붙인 다음에 나한테 오더니 이러는 거야. “스노우볼, 오늘은 예방주사 맞으러 가는 날이야. 가서 얌전히 굴어야 돼, 알겠지?” 예방주사? 그게 뭐지?


그러더니 안젤로는 나를 조그만 문이 달린 상자 안에 내 장난감이랑 취침용 헝겊을 같이 넣어서 나를 상자째 데리고 나가. 우리 어디 가는 거지? 자상한 안젤로가 데려가는 곳이니 위험하고 나쁜 곳은 아닐 거야. 우리 둘만 가나 했는데 자기도 같이 가.


도착한 곳은 개와 고양이 그리고 두발동물들이 많은 곳이야. 다 뭔가를 기다리고 있어. 나만 처음 와보나 봐. 근데 다른 녀석들은 지금 잔뜩 겁먹은 것 같아. 냄새가 나더라고. 여기 깨끗하고, 두발동물들도 다 친절한 것 같은데 왜지?


하얀색 헝겊을 붙인 두발동물이 와서 내 이름을 불렀어. 그리고 우리는 다 같이 다른 큰 상자 안으로 들어가. 안젤로가 눈물을 글썽여. 나는 안젤로가 걱정이 되어서 ‘왜 그래? 여기 다들 친절해. 여기 안전해'하고 안젤로에게 말했어. 그랬더니 자기가 안젤로한테 “베이비, 괜찮아. 스노우볼이 얼마나 의젓한데.”라고 하고 안젤로는 “스노우볼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잖아 지금!“ 이러더라고.


그러더니 하얀 헝겊을 붙인 두발동물이 안젤로랑 자기한테 그랬어. “아무래도 일단 광견병이랑 파보는 꼭 접종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 두발동물도 목소리가 조곤조곤해. 무슨 말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안심이야. 안젤로랑 자기는 이 두발동물과 이런저런 소리를 나눴어.


그러고 나서 하얀 헝겊을 붙인 두발동물이 원기둥 형태의 무언가를 들고 나를 향했어. “아이 우리 예쁜 스노우볼. 이거 맞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자!” 이렇게 말하더라고.


나는 뭐가 뭔지 몰라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몸이 따끔했어! 너무 놀라서 아무런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고!


아 이런 배신감… 안젤로 믿고 있었는데, 왜 나를 이 하얀 헝겊 두발동물한테 데려온 거야. 하얀 헝겊 두발동물이 나를 놓아주자마자 나는 안젤로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냈어.


그러고 나서 안젤로가 그러는 거야, “미안, 스노우볼. 그래도 너 너무 장했어!” 그러고 나서 나한테 내가 새로이 맛 들인 연어 간식을 줬어. 뭐야 이거… 따끔하게 하고 나서 간식 주고. 쳇. 그래도 안 먹기엔 아깝고. 내가 한 번만 봐준다, 너, 안젤로!


안젤로랑 자기랑 흰색 헝겊 두발동물은 이런저런 소리를 나눴어. 자기들끼리 죽이 맞는지 또 그사이에 하하호호하고, 서로 네모난 종이도 주고받고 그러더라. 다음에 같이 식사라도 같이 하자면서. 나는 아까 따끔했던 것에 너무 놀라서 큰 관심을 안 줬어.


그러고 나서 안젤로랑 자기가 날 보금자리로 데려왔는데, 갑자기 나 너무 졸리지 뭐야. 그래서 그대로 뻗어버렸지. 내가 눈을 감으려는데 안젤로랑 자기가 나하네 인사하고 나가는 소리가 들려.


이번엔 안젤로랑 자기가 먹이를 잡아올까? 못 잡아와도 뭐 먹을 건 많으니까… 근데 나 너무 졸려.. 잠깐 눈 좀 붙였다가 마저 생각..해봐야지……




* 안나 파블로바는 19세기 러시아의 발레리나로 그의 <빈사의 백조>라는 작품이 영상화되어 남아있다. 안나 파블로바는 당대 다른 발레 무용수들과 달리 가냘픈 몸매를 지녔다. 그의 인기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발레 무용수라면 가녀린 몸매를 유지해야 한다는 경향이 생겨났다. 오늘날 생각하는 여자 발레 무용수의 원형인 인물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본 단편 소설은 연작 소설 <이십사야> 중 세 번째 편입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매일 한 편씩 업로드되며, 총 24편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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