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넷째 날
“와, 벌써 12월 4일이야. 크리스마스는 20일 남짓, 올해는 한 달도 안 남았어. 무섭다 그치? 성준 씨는 이번 크리스마스에 뭐 해? 뭐 여자 친구랑 데이트하나?”
“그냥 별다른 계획 없어요. 친구나 가족이랑 밥 먹고 쉬고 뭐 그러는 거죠.”
“뭐 어디 구경도 안 가고? 한국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어디가 핫플이고 그런지 모르나? 그 신세계 백화점 본점이랑 더 현대 이런 데 가면 크리스마스 장식 정말 잘해놓던데.”
“제가 사람 많은 곳은 별로 안 좋아해서요.”
안젤로는 이탈리아에서 왔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꽤나 기다리고 있지만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그냥 빨간 날. 어쩌다 보니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날. 그리고 미국적 자본주의 소비주의의 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국가 종교가 기독교도 아닌데 이렇게 모두가 대대적으로 크리스마스 타령을 부르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쉬는 날이 하루 더 늘어나는 것 하나는 감사할 일이다. 더군다나 회사 창업자가 신실한 기독교인이라 다른 날은 몰라도 크리스마스만큼은 회사 문을 꽉 잠가 버린다. 내게 특별한 날은 아니어도 싫은 거 역시 없는 날이다. 물론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고, 차이코프스키의 선율을 흥얼거리는 안젤로의 모습은 귀엽기 그지없지만.
짬뽕면이 이에 닿는 쫄깃함을 즐기는 순간에도, 내가 묻지 않아도 분명 박 팀장님은 자기 크리스마스 계획을 얘기할 거란 걸 안다.
그리고 역시나.
“그렇구나. 난 남의 편이 허락해주면 친구들이랑 술 한 잔 하고, 아니면 집 가야지 뭐. 젊을 땐 잘생긴 놈 얼굴 뜯어 먹고 살겠다고 키 크고 얼굴 훤한 놈으로 결혼했는데 나이 먹고 나니까 자기 관리 안 하면 그냥 말짱 꽝인 건 다 똑같더라고. 그래서 이제 집 가는 재미가 없어. 그러니까 성준 씨는 결혼하지 말고 연애만 해, 연애만.”
참 이런 개인사를 헤집는 질문들은 곤란한 게 아니라 귀찮다. 성가시고. 그리고 내 영역을 침범하는 것 같아서 불쾌하고. 그리고 마지막 저 멘트. 하나부터 열까지 코멘트할 것이 많기 때문에 코멘트를 생략하는 것이 낫다. 저런 말이 들릴 때 내 전략은 밥을 먹느라 바쁜 척하는 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음식으로 화제 전환.
“와, 진짜 이 집 짬뽕 너무 맛있네요. 국물이 속이 확 풀리는 게, 어우. 역시 겨울엔 짜장면보단 짬뽕인가 봐요.”
“그렇게 맛있어? 하긴, 나도 집밥 빼곤 다 맛있더라. 근데 성준 씨는 진짜 연애 안 해? 우리나라 출산율 낮다고 난린데, 성준 씨같이 인물 훤칠하고 떡대 좋고 어? 그런 사람이 애국 좀 해야지.”
“아뇨 팀장님 지금 출생율이 문제가 아니라요, 와 국물이 진짜. 그냥 세상만사 모든 근심이 아주 그냥 다 싹 잊히네요. 식기 전에 한 술이라도 더 드세요.”
이렇게 본인이 쓴 단어가 아니라 은근슬쩍 다른 단어로 수정하여 말해줬는데도 박 팀장님은 그 차이를 듣지도 못한 모양이다. 깨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떠먹여 줄 수도 없고. 이렇게 내가 짬뽕 국물을 예찬하는데도 국물엔 관심도 안 보이는 인간에게 내가 어떻게 무슨 깨달음을 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이러니까 요즘 사람들이 ‘될놈될 안될안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라고 하는 건가?
“에이 성준 씨, 나랑 밥 처음 먹어? 나 원래 밥 먹을 때 국물이랑 소스 안 먹잖아.”
박 팀장님은 어린 시절 ‘탤런트’ 지망생이었을 때부터 자발적 그리고 비자발적으로 엄격한 자기 관리를 했던 경험으로 인해 애초에 끼니도 잘 안 먹고, 먹을 때도 가려 먹는 편이다. 회사가 그리 크지 않은 터라 하는 업무가 달라도 간혹 식사를 같이하게 되어 이거 하나는 빠삭하게 기억난다. 카메라 앞에 서면 10킬로는 쪄 보이니까 키에서 120을 뺀 숫자로 몸무게를 맞춰야 한다나. 그래서 키가 163 정도인 박 팀장님은 아직까지도 40킬로를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20시간 금식이 자기 원칙이란다. 탤런트 공채를 수두룩하게 떨어지고 나서는 그 지겨운 관리를 그만뒀을 법도 한데, 진짜 끈기 하나, 그리고 꾸준함 둘. 이렇게 두 가지는 알아줘야 한다.
이렇게 안 드실 거면 오늘 왜 괜히 나더러 중국집에서 밥을 같이 먹겠냐고 물어보셨는지 알 수가 없다. 주말에도 출근하는 가여운 영혼과 신체들을 위해 공유 오피스에서 주는 샌드위치 같은 걸로 때우고 그냥 빨리 업무 끝내고 집 가서 체스나 두고, 우리 안젤로랑 스노우볼이나 보고 싶은데. 월요일인 내일도 봐야 할 얼굴인데. 내 얼굴 질리실 텐데.
“성준 씨 근데 이거 먹고 디저트는 안 필요해? 여기 단팥 찹쌀빵 같은 거랑, 그 리치 들어간 디저트 그런 것 맛있는데.”
“박 팀장님 드실 거예요? 저는 사실 단 걸 그리 좋아하진 않아서요.”
“아 그렇구나. 아…”
내가 디저트라도 시켜서 자기랑 오랫동안 여기서 이야기 나누길 바라는 눈치다. 근데 도대체 무슨 이야길 하고 싶어서 이렇게 이야기를 베베 꼬나. 나는 이미 해물도, 면도 다 먹고 국물까지 바닥 낼 포인트인데.
“실은 있잖아 성준 씨, 내가 오늘 성준 씨한테 밥 먹자고 한 게… 할 얘기가 있어선데 그렇게 쉽게 입에서 떨어지진 않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한테 꼭 하고 싶으신 말씀인 것 같은데. 이왕 하실 거면 편하게 하시죠.”
“역시 엠지 세대들은 달라. 시원시원하네.”
나는 그에 토를 달지 않고 박 팀장님께서 본론을 말하길 기다렸다.
“나 있잖아, 실은, 나 완혼 하려고 해.”
내가 워낙 한자어에 약해서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었다.
“그니까, 요새 사람들이 폐경이라고 안 하고 완경이라고 하잖아? 그거처럼 결혼 생활을 완결 짓고 다음 챕터를 시작하려고.”
아. 혼인 관계를 해지하신다는 말씀이시구나. 아깐 크리스마스 때 ‘남의 편'이 허락 안 해주면 집에서 같이 보내신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실 것 같은데, 팀장님께 더 행복한 결정이라면 뭐든 응원합니다.”
“역시 엠지 세대는 달라, 달라.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한테 아직 잘 못하겠더라고. 근데 우리 회사 복지 같은 거 성준 씨가 담당하니까. 우리 회사 리트리트 같은 거 갈 때 그 사람도 같이 가고 그랬고, 이런저런 혜택 받는 거 있잖아. 그거 정리해야 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내가 서면으로 쑥 내밀기가 그렇더라고. 성준 씨가 놀랄 수도 있고 그렇잖아.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성준 씨한텐 꼭 직접 말하고 싶었어.”
박 팀장님은 정말 담백한 표정으로 이 얘길 했고, 그래서 나는 박 팀장님과 철저한 업무 상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박 팀장님께 식사 뒤 박하사탕이라도 하나 챙겨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아까 얘기하신 디저트는 좀 드시려나.
“팀장님, 어려운 이야기 저한테 믿고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아까 이야기하신 디저트 먹을까요? 전 갑자기 좀 달달한 게 당기는데.”
“와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성준 씨도 이제 진짜 눈치란 게 생겼나 보네? 내가 먹고 싶은 거 눈치챘구나. 뭐 먹을래, 성준 씨?”
“저는 아까 말씀하신 거 둘 다 좋습니다.”
우린 결국 리치랑 파인애플이 들어간 과일 펀치를 시켰다. 리치의 겉껍질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속살은 꼭 르누아르가 그린 소녀들의 볼처럼 은은하게 발그레하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한 결 차분해지는 색감이다. 거기다 달짝지근하고 상큼하니, 탄수화물과 당이 인격을 만든다는 말은 과학적으로 썩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근데 있잖아, 사람들이 자꾸 나한테 그 사람 잘 있냐, 그 사람이랑 테니스 한 번 치러 같이 회동해야 되는데 이런 얘길 많이 하더라고. 그때마다 참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곤란해. 성준 씨라면 어떻게 하겠어? 우리 엠지 세대한테 한 번 고견을 여쭤보고 싶네?”
내 이야기를 아예 하지 않고 팀장님께 위로를, 내 생각을 전달하긴 힘들 것 같다. 나도 결국 그어놨던 선을 잠시만이라도 지워버려야 했다.
“저 어렸을 때 저희 부모님께서 이혼하셨어요. 그래서 팀장님 상황이랑은 똑같은 건 아니지만, 그 입장이 상상이 되긴 합니다. 팀장님 무조건 마음 편하신 대로 하세요. 다른 사람 눈치도 보지 마시고, 구설수 이런 것도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팀장님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세요. 우리가 친목 도모하려고 회사 다니는 건 아니니까요.”
“역시, 역시. 엠지 세대는 달라. 성준 씨 정말 고마워 오늘. 성준 씨가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나 많이 떨렸는데. 역시 툭 털어놓길 잘했단 생각이 드네. 진짜 고마워. 오늘 밥은 당연히 내가 살 거야. 성준 씨의 귀한 일요일 점심시간을 내가 차지한 거니까.”
“네, 감사합니다.”
“아 근데 성준 씨, 혹시 테니스는 안 쳐? 왠지 성준 씨 테니스 코트에 있으면 포스 장난 아닐 것 같은데.”
“대학교 때 좀 치긴 했는데요, 한국 돌아오고 나선 아직 안 쳐봤습니다.”
“오, 역시. 아니 우리가 회사에서 윔블던이랑 유에스 오픈 얘기하면 항상 성준 씨의 안테나가 쫑긋하는 걸 느꼈다니까. 다음에 나랑 한 번 치러 가자, 어때?”
테니스를 못 친지 좀 오래되어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썩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네 뭐, 저야 좋습니다.”
디저트까지 다 먹고 나서 우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대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는 팀장님께 감사 인사를 했다.
식당 출구에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춤을 추는 산타 인형이 있었다. 움직임을 감지하는지, 우리가 다가가자 갑자기 산타 인형이 우렁찬 기계음으로 “호, 호, 호,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 이어!”라고 외쳤다.
“어머 얘 좀 봐라. 궁디 움직이면서 춤추는 것도 웃겨 죽겠는데 인사까지 다 하네.”
“그래도 맞는 말을 하네요. 아직 좀 시간이 남았지만, 팀장님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 이어입니다.”
“성준 씨도! 나 진짜 뉴 이어에는 해피 뉴 이어 할 거야. 성준 씨도 나도 해피 뉴 이어 하자.”
“네, 팀장님. 우리 다 해피 뉴 이어 해요.”
자 그럼 이제 혼자 집을 보고 있을 스노우볼을 보러, 그리고 안젤로와 잔잔한 저녁을 보내기 위해 주말 특근을 후다닥 마무리해볼까?
본 단편 소설은 연작 소설 <이십사야> 중 네 번째 편입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매일 한 편씩 업로드되며, 총 24편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