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다섯째 날
그 사람 없이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18년 만에 처음이 될 예정이다. 첫 연애를 통해 배우자를 만나고, 결혼 이후에는 단 한 번도 그 사람 없이 크리스마스를 보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 사람이 없는 크리스마스란 무엇인지 아직 상상도 안 된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그 사람은 “모태신앙" 가톨릭이어서 크리스마스마다 명동 대성당으로 향했다. 우리 둘만 간 것은 아니고 모태의 그 모까지 같이.
셋이서 항상 명동으로 향해서 일단 저녁으로 노포 식당에 가서 곰탕을 먹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특별한 날이라고, 일반 곰탕이 아니라 특곰탕으로. 예수님 탄생에 힘든 일은 성모 마리아께서 다 하셨는데, 그 득은 우리가 보는 순간이다. 짧게나마 말이다. 마치 마흔 넘어서까지 내 생일마다 생일 축하한다며 미역국을 끓여주시는 우리 엄마가 생각난다. 딸이라고 하나밖에 없는 이 녀석은 엄마 생신도 제대로 안 챙기는데. 내 생일에 고생은 우리 엄마가 해놓고, 미역국은 내가 먹는다. 이런 걸 보면 정말 난 언제 어른이 되려나 싶다.
그 사람의 모친은 그 사람 나이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 사람의 수저 위에 계속 깍두기를 올려주었다. “더 먹어 우리 장한 아들“ 이러시면서. 자기 몫의 고기까지 아들의 그릇에 덜어주었다. 그리고 나선 ”승아, 너 어차피 그거 더 안 먹을 거지? “라며 내 곰탕의 고기까지 아들의 그릇으로 옮겨다 주었고, 그 사람은 헤벌쭉 웃으며 아주 맛있게 곰탕을 먹었다. 내 특곰탕은 순식간에 흰 쌀죽 같아 보이게 되었다.
밤이 깊어지면 성당으로 향했다. 추운 겨울바람 때문에 아무리 두꺼운 양말을 신어도 발이 땡땡 얼어붙어 아무런 감각이 없고, 손가락이 있는지 조차 모르게 될 정도지만 그래도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꼭 명동대성당 마당에 위치한 마구간 장식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가 자정 미사를 드렸다.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게, 예수님 탄신일이 12월 25일이 맞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선 0시에 딱 맞춰 태어나셨나? 그리고 예루살렘의 현지 시간에 맞춰 미사를 드리는 게 더 맞지 않나? 나는 신학자가 아니니까 당연히 이에 대한 답은 모르고, 이런 잡동사니 같은 물음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17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나랑, 그 사람이랑, 그 사람의 모친이랑.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집을 나가고 나서도 모친을 위해 크리스마스는 꼭 이렇게 셋이서 보냈다. 둘이 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냈냐는 그의 모친의 말에 항상 그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척하곤 했었다. 나는 그의 태연한 얼굴을 보고 이게 효도가 맞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박자에 맞춰줬다.
습관은 그 어느 귀신보다도 무서워서 나는 올해 크리스마스에 명동 대성당으로 가지 않는다면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제 정작 성준 씨에게는 어느 쇼핑몰의 장식이 멋들어진다더라 하고 얘기했지만 나도 직접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근데 그렇게 어제 성준 씨와 속을 털어놓고 나니 정말 새 챕터를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의 남은 모든 물건을 상자에 넣고 택배로 부쳤다. 선물을 주는 것도 아닌데 굳이 얼굴 마주 보고 돌려줄 필요는 없으니까. 게다가 오늘은 일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최대의 적기다.
며칠 전부터 계속 만나자고 보채던 사람이 있는데 계속 답을 하지 않았다. 내 나이 마흔셋, 과연 갓 서른이 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완혼 절차를 밟고 있다 한 들, 아직 도장이 꽉 찍히고 판사의 봉이 탕탕 쳐지기 이전이었다. 그 사람이 이미 집을 나간 지 한참 되었는데도, 나는 단순히 아직 나의 법적 신분이 기혼자라는 이유만으로 계속 나를 보고 싶다던 사람을 뿌리쳤다. 아 물론 나이 차이도 한몫하고.
마지막으로 그 꼬마가 보낸 문자들은 이랬다.
- 승아 씨, 주말 잘 보내고 있어요? 이번 주말에는 꼭 보고 싶었는데. 요새 기온이 체감 영하 이십 도까지 떨어져서 많이 추운데 몸은 괜찮고요? 옷 따뜻하게 잘 입고 다녀요.
- 오늘은 그래도 햇빛을 쬘 수 있는 날이네요. 광합성 제대로 안 하면 면역력도 떨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잠깐이라도 햇빛 꼭 쬐세요. 오늘 뭐 즐거운 일 하시나요?
나는 꼬마의 메시지를 읽었지만 다시 답하진 않았다. 솔직히 그의 메시지를 재차 여러 번 읽었다. 왜 나에게 이렇게 많은 관심을 보일까? 나보다 자기랑 죽이 더 잘 맞는 사람들 얼마든지 있을 텐데. 나는 꼬마에게 여러 번이고 말했다. ‘아직 어린데 더 놀아. 뭐하러 나 같은 사람이랑 만나.’ 꼬마는 그럴 때마다 “‘나 같은 사람'이 뭔데요? 츤데레 같지만 알고 보면 자기 사람 잘 챙기고 겉이나 속이나 아름다운 사람이요? 나이 차 얘기하는 거면, 프랑스 대통령이랑 영부인 못 보셨어요? 사람 마음 앞에 나이 차이 그런 거 아무것도 아닌 거.” 꼬마야… 그건 프랑스지 한국이 아니잖아.
근데 자꾸 앞뒤 안 가리고, 물불 안 가리고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와서 자기 자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내놓지 않겠다는 양, 내가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버티고 있겠다는 양, 버티고 있는 꼬마를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그건 빨갛디 새빨간 거짓말이다.
루돌프가 무색할 정도로 코가 빨개지는 하루지만, 점심시간에 밖에 나와보니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기 싫어졌다. 그래서 반차를 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거래처나 회사나 다들 연말에는 느리게 움직이기도 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의 대부분을 오전에 끝내 놓아서 오늘 못한 몫은 내일 하면 된다.
핸드폰을 계속 만지작 거리다가 결국 나의 엄지가 내 뇌를 이겨버렸다.
- 재원 씨, 나 지금 반차 내려고 해.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답이 온다.
-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승아 씨? 어디 아파요? 지금 어디예요? 제가 거기로 갈게요.
- 아니, 그런 거 전혀 아니고. 점심 먹으러 나왔는데, 해도 좋고 그래서 다시 들어가기가 싫네? 연말인데, 크리스마스 분위기도 만끽하고 싶고.
- 아아, 정말 다행이에요. 어디 아픈 건 아니라니. 크리스마스 분위기 저랑 같이 즐겨요. 저 아직 연차 좀 남았어요 어차피.
- 진짜 그래도 괜찮겠어?
- 주말 내내 연락 기다렸다고요. 이렇게 온 연락 그냥 넘기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그렇게 꼬마의 친구가 일하고 있다는 쇼핑몰로 갔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친구 덕에 조금 더 쉽게 크리스마스 마을에 입장할 수 있었다. 가보니 정말 어마어마한 크리스마스 마을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이 마을의 주민들은 인간이 아니라 곰인형들. 자연 속에서 저렇게 큰 나무를 본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도 있었고, 함박눈을 맞은 것 같은 크리스마스트리, 빨간 곰인형이 달린 크리스마스트리. 트리란 트리는 다 여기에 있는 듯했다. 그리고 오두막들이 많았는데 오두막에는 모두 곰들이 우리를 맞이 해주고 있었다. 오두막에 들어갈 때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느라 좀 피곤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크리스마스는 처음이라 얼마든지 참아줄 의향이 있었다.
평일 낮인데도 인파는 또 얼마나 많은지. 다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셀카도 찍고, 같이 온 친구나 연인의 사진도 찍고. 오두막은 우리가 가고 싶은 순서대로 고른다기 보단 인파가 정해주는 순서대로 보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LED 전구에, 스마트폰 화면과 플래시에 정신이 없는 사이, 나도 모르게 발을 헛디딜 뻔했다. 내 바로 옆에 있던 꼬마가 내 어깨를 잡으며 날 부축했다. 순간 놀란 나머지 움찔했다.
“괜찮아요? 크게 다친 건 아니죠?”
‘괜찮아요?’ 꼬마는 분명 내 발목 얘길 한 건데, 나는 괜스레 눈물이 났다. 내가 최근 몇 년 간 그 사람에게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괜찮아.”
나는 혼자 제대로 서려고 했다.
“자 여기요, 여기 이렇게 사람 많은데 이럴 땐 버디 시스템이 꼭 필요한 거라고요.”
꼬마는 손을 내밀었다. 처음 제대로 꼬마의 손을 봤는데, 매니큐어 모델이라도 해야 할 것처럼 곱디 고운 손이었다. 얼굴이 귀까지 다 빨개지는 기분이었지만 꼬마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일단 손을 잡았다.
스마트 워치에 경고 메시지가 떴다. ‘심박수가 일정치 않습니다.’ 사람보다 기계가 사람의 마음을 더 잘 아는 세상이다.
꼬마는 그걸 내 어깨너머로 보더니, 좋아 죽겠는 걸 꾹 참으려는 표정이었다.
“뭐야, 이런 걸 다 훔쳐보고. 개인 프라이버시라고.”
“회사에서 승아 씨 급하게 부르는 건 줄 알고 긴장해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그렇게 곧 우리가 오두막에 들어갈 수 있는 차례가 왔다. 달콤한 디저트들과 초, 반짝이는 빛들이 식탁 위에 정성스레 차려져 있었고, 우릴 맞이하는 호스트는 역시 곰들이었다.
“거기 그냥 그렇게 있지 말고 포즈 좀 잡아봐요. 사진 찍게.”
“뭘 남사스럽게 사진을 찍는다 그래, 그냥 구경만 하면 되지.”
“그래야 나중에 승아 씨가 발뺌 못한 증거가 남을 거 아니에요? 우리 이렇게 데이트 나왔다고.”
“우리 데이트라고 한 적 없는데? “
“어서요, 포즈도 잡고 해 봐요. 잘할 것 같은데.”
나는 마지못해 하는 척하며 재원 씨의 요청에 응했다.
“이럴 줄 알았어, 하면 다 잘할 거면서.”
재원 씨가 보여주는 사진 속 내 모습은 지난 몇 년간 본 적이 없는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내가 이렇게 스스로에 대해 말한다는 게 좀 쑥스러우면서도, 나는 환해 보였다.
“승아 씨, 그 영국 그림책 알아요? 골디락스와 곰 세 마리 이야기?”
“아니,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그 노래도 아니고? 처음 들어보는데?”
“골디락스라는 소녀가 숲을 헤매다가 한 집에 들어가요. 근데 그 집은 인간이 사는 집이 아니라 여기처럼 곰들이 사는 집인 거예요. 근데 곰들은 그 집을 잠시 비운 상태였어요. 골디락스가 그 집의 이것저것 탐험하다가 부엌에 가서 의자 세 개를 발견해요. 하나는 아빠 곰의 커다란 의자, 하나는 아기 곰의 아주 쁘띠한 의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엄마 곰의 의자. 골디락스가 그 의자 세 개 모두에 앉아보는데, 아빠 곰의 의자는 너무 크고, 아기 곰의 의자는 너무 작아요. 근데 엄마 곰의 의자는 딱 맞는 거예요.”
“골디락스가 그렇게 집을 헤집고 다니는데 곰들이 귀가도 안 하고 벌도 안 줘? 그거 주택 침입죄 같은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난 지금 승아 씨에게 골디락스가 엄마 곰의 의자에 앉았을 때 느끼는 적당함, 편안함. 그런 걸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단 말을 하는 거였어요. 승아 씨한테 딱 맞는 사람이요.”
또 눈물 뽑으려고 그러나, 이 꼬마 왜 이러지.
“어으, 갑자기 느글느글하게 왜 그래. 우리 나가서 이 속 가라앉히게 커피나 한 잔 하자.”
“좋아요 커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재원 씨는 내 손을 살포시 잡았다. 그의 손이 내 손과 포개지자, 나한테 안성맞춤인 안락의자에 앉은 것처럼 너무도 적당했다.
포근하고. 설레고.
골디락스는 의자 세 개에 앉아보고서야 맞는 의자를 발견했는데, 나는 일평생 의자 하나에만 앉아보고 나랑 맞는 의자를 찾은 줄 알았다.
지금이라도 내게 딱 맞는 의자를 발견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