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이십사야

구두방의 약속

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여섯 번째 날

by 다정

누구에게나 그런 물건이 하나쯤은 꼭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하더라도, 계속 고쳐가면서라도 쓰고 싶은 것. 내게는 이 정장 구두가 바로 그런 물건이다. 얼핏 보기엔 뭐 하나 특별한 것이 없다. 그냥 정장 구두 하면 딱 떠오를 법한 그런 디자인이다. 검은색의 소가죽 구두. 하지만 내가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형이 선물해준 구두였다. 발에 익은 구두라 그 어느 구두보다도 내가 즐겨 신게 되었고, 소중히 다뤘음에도 시간 앞에 장사가 없다고 나 혼자만의 관리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대학생 때 알게 된 학교 캠퍼스 근처의 구두방을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계속 찾아가게 되었다. 잔병치레를 하면서 동네 가정 의학과 병원을 드나드는 사람처럼, 구두에게 사소한 문제라도 생기면 구두방을 찾았다. 이번엔 뒷굽이 많이 닳은 데다가, 어쩌다가 윗부분이 찢겨나가 구두방을 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그렇게 찾아온 구두방. 언제나처럼 사장님께서 좋아하시는 달달한 율무차를 챙겨갔다. 십이월의 저녁이고, 나나 사장님이나 아직 저녁을 못 먹은 시간이라 이 율무차가 더 맛있을 거다. 찬 바람에 율무차가 식을까, 벙어리장갑을 종이컵에 끼워서 가져갔다. 예전엔 구두방이 참 번잡했는데, 오늘은 날이 추워서 그런지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그 덕에 사장님께서는 구두를 보시기 전, 잠깐이나마 여유를 즐기시며 율무차를 맛보셨다.


“내가 좋아하는 건 또 이렇게 귀신같이 기억해가지고. 고마워요.”


“고맙긴요, 항상 기적을 일으켜주시는 사장님인데 제가 이런 거 하나 대접 못하겠어요?”


율무차의 달달함이 구두방의 공기까지 고소하고 달큼하게 데웠다. 사장님께선 그 뜨거운 율무차를 후다닥 드시더니, 내 구두가 들어있는 쇼핑백을 열어보셨다.


“그럼 이제 한 번 볼까. 뭐야, 또 같은 구두 가져왔어? 에이, 학생 이건 이제 더 못 신어. 나랑 이 구두한테 돈 더 쓰지 말고 이제 그냥 새 구두 좀 사. 벌써 나한테 쓴 돈이면 새 구두 사고도 남았겠다. 아니, 이 구두 값보다도 더한 돈을 여기서 썼겠어!”


“안 돼요, 사장님. 이거 제가 정말 아끼는 구두인 거 아시잖아요. 어떻게 좀 안 될까요?”


사장님께선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아직도 가끔 나를 학생이라고 부르신다. 내가 취직 기념으로 자양강장제를 한 상자 사다 드리며 인사를 드렸는데도 말이다. 나를 학생일 때 처음 보셔서 그런 건데, 호칭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나머지 나는 사장님께서 어떻게 불러주시든 정겹게 생각한다.

처음엔 학교 여자 동기들이 간혹 구두에 문제가 생기면 여길 찾아오는 걸 보고 알게 되었는데, 아기는 물건을 오래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곳이라 나까지 사랑하게 된 공간이었다. 학생인 내가 제 아무리 과제와 과외 활동으로 바쁘다 한 들, 학생회관 구두방의 사장님 손길만큼 우리의 발길이 바쁘진 않았다. 언제 오나 항상 신발을 손 보고 계셔서 식사는 언제 드시나, 제대로 드시긴 하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올 때마다 가본 적은 없지만 왠지 그리스 남부에서나 경험해볼 수 있을 것 같은 태양의 에너지 그 자체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근처를 지나갈 때면 고칠 것이 없어도 항상 들러서 인사를 드리곤 했다. 그 뜨거움이 내게 조금이라도 묻어나길 바라면서.


“아니 요새 젊은 사람들 보면 새것을 그렇게 좋아하더니만, 자네는 허구헌 날 여기 와서 왜 이러시는가?”


“그 어떤 새 구두도 이 구두가 아니잖아요. 어떻게 좀 안 될까요 사장님?“


“으휴, 자네는 내가 이 일 그만 두면 어쩌려고 이래, 응?”


“사장님 그만두시면 저 정말 곤란해져요. 이 구두는 저랑 평생 해야 할 구두인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사장님도 저랑 평생 함께 가셔야 되는 거 다 아시면서.”


“허허, 이 사람 말하는 거 보게나. 하여간에 굳이 이걸 꼭 고치고 싶다는 거지?”


“네. 꼭 고치고 싶어요.”


“알았어. 그럼 내가 마지막으로 한번 고쳐보지.”


“마지막이요?”


“내 나이가 몇인데, 이제 좀 쉴 때가 됐지.”


“사장님 말씀도 참. 요샌 80은 되어야 중년으로 쳐주는 거 아시죠?”


“젊은 학생이 나이 운운하긴.”


“아직 한창이시잖아요.”


“한창은 무슨, 이 사람아. 내 나이가 벌써 일흔 하나야.”


“그러면 꽃청년이시네요 꽃청년.”


“하여간에 말하는 것 하고는 번지르르해서… 이거 내일모레까지 찾으러 와.”


“아 제가 내일모레까지 엄청 바쁜데…”


“그럴 거면 이거 그냥 도로 가져가.”


“왜요, 사장님. 글피에 가지러 오면 안 될까요?”

나는 애교를 잔뜩 담아 사장님께 청해봤다.


“글피엔 내가 여기 없어서 그래, 이 양반아.”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아까 말했잖여. 언제까지 내가 이거 하고 있겠냐고.”


“아니 우리나라에 사장님처럼 구두 수선 잘하시고, 구두 사랑하는 분이 어딨다고요.”


“에이, 그게 아니라.”


불길한 예감은 왜 맞아떨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 마누라가 많이 아파. 그래서 내가 하루 종일 여기 있을 게 아니라, 우리 마누라를 챙겨줘야지.”


“사모님께서 어디 편찮으세요?”


“그 양반도 이제 나이가 일흔을 바라보는데, 몸이 성하기만 하겠어? 젊었을 때 힘든 일 많이 해서 몸이 다 안 좋지 뭐. 전에 좀 아팠는데, 병이 다시 재발했대. 내가 처음부터 더 잘 보살펴주고 그랬어야 했는데. 일한다고…”


“아, 정말 많이 속상하시겠어요…”


“내가 속상한 건 아무것도 아니지. 본인이 제일 힘들고 속상하고 그러지. 맨날 일만 허느라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이럴 때라도 내가 옆에 있어줘야지.”


나름 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는데, 그때 배운 전공 지식은 이런 상황에서 하등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래도 사장님께서 곁에 있어주신다니 사모님께서도 든든하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마누라가 이번 크리스마스에 꼭 눈을 보고 싶다고 허는데, 눈이나 내렸으면 좋겠네. 요새 영화 많이 보고 그래서 그런지… 자꾸 자기한테 다음 크리스마스가 없으면 어떡하냐는 둥 망측한 소리를 해대서 원.”


“치료 잘 받으셔야죠. 좋은 생각만 하시면서요. 근데 사모님께서 눈을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승아 씨와의 크리스마스 계획을 세워볼까 하여 계속 크리스마스이브와 당일의 날씨를 주시하고 있는데, 올 크리스마스에는 눈 소식이 없는 듯했다.


“좋아허지, 눈. 우리 처음 만난 날에도 함박눈이 내리고 그랬거든. 물론 눈 내리면 운전하고 밖에서 걸어 다니고 그러는 사람들은 힘들어도, 안에서 보고 있으면 예쁘잖아.”


없는 눈 소식이지만, 그래도 꼭 눈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장님께서는 십 년 넘게 나를 보시고, 수년간 내 신발들을 고쳐주셨는데 왜 나는 사장님을 위해 눈 소식 하나 고쳐드릴 수 없는 사람인 것일까. 물론 그러려면 마법이 필요하겠지만.


“아 사장님, 근데 그러면 이 구두 방은 아예 닫는 거예요?”


“그렇지. 요새 누가 이런 일 하려고 해. 그러니까 재원 학생도 얼른 새 구두도 사서 신고 그래. 맨날 고쳐 쓸 생각만 하지 말고. 내 딸내미도 이제 나더러 일 그만하고 지 엄마랑 시간 더 보내라고 하드라구. 자기가 찻집 내 가지고 돈 벌고 하니까.”


“따님이 대단하시네요. 여기 구둣집 단골 못하면 그 찻집이라도 단골 되어야겠어요. 거기가 어디예요?”


“왜,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우리 딸 어떻게 좀 해보려고? 아무리 학생이 훤칠해도 우리 딸이 아깝지.”


“에이 사장님 참. 저 만나는 사람 있어요. 따님 찻집이라도 가서 간간히 사장님 안부 여쭙고 그러려고 그러죠.”


“흑심 품은 거 아닌 거 맞지? 그럼 뭐.. 서울 아트 센터 근처 골목에 가방다방이라고 있어. 그 아트 센터에서 하는 것보다도 음악 선곡이 일품이야. 우리 딸이 음악 정말 좋아하거든.”


“가방다방이요?”


“어, 우리 딸이 처음에 한글 깨칠 때, 길 가다가 ‘다방'만 보면 ‘가방’을 잘못 쓴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때마다 얼마나 까무러치게 깔깔대며 좋아하던지. 딸이 그러던데, 우리끼리 뭐, 인사이드 조크 그런 거라고.”


“아! 거기 어딘지 알 것 같아요! 저도 회사가 거기서 멀지 않아서 몇 번 지나쳐가 본 것 같아요. 날 좋을 때 지나가면 문이 열려 있어서 커피 향도 나고, 클래식 음악도 들리고 그러더라고요. 진녹색 벨벳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짙은 색 나무로 인테리어 되어있는 그 찻집 맞죠?”


나는 확인차 소셜미디어를 켜서 가방다방의 사진들을 사장님께 보여드리며 재차 물었다.


“역시 좋은 덴 다들 알아보나 보네. 응 맞아, 거기.”


“역시 사장님 같은 완벽주의자 아버님을 둔 따님도 취향이 섬세하기 그지없나 봐요.”


“그런가, 허허. 우리 마누라 닮아서 그래. 우리 마누라가 또 얼마나 세련된 사람인지 몰라.“


따님과 사모님을 떠올리시자, 사장님의 얼굴은 또 태양처럼 빛났다.


“사장님 저 그러면 내일모레 여기 와서 신발 찾아가고요. 저 홍보 대행하고 이벤트 기획하고 그러는 거 아시죠? 전에 명함도 드렸잖아요. 좀 좋은 생각이 났는데, 제가 따님께 연락드려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이렇게 일을 벌이게 되나, 그래도 일을 벌이면 행복해지니까.


“흑심 없다며, 무슨 또 연락을 하려고 그래.”


“에이 사장님 저 진짜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여기 사진도 보여드릴게요.”


나는 마침 어제 승아 씨와 찍은 사진을 내밀었다.


“학생, 능력도 좋아. 이런 선한 인상의 사람을 또 어디서 만났누.”


“운이 좋은가 봐요.”


“그 운, 우리 딸내미한테도 좀 나눠주고 그래.”


“사장님께 제가 받은 기운이 얼만데, 운이야 얼마든 나눠줘야죠. 복은 나누면 줄어드는 게 아니라 배가 된다잖아요.”


“그려 그럼. 자네 연락처 줘. 내가 딸내미한테 줄게. 그리고 연락을 하든 말든 그건 우리 딸내미 맘대로 하는거여. 오케이?”


“오케이입니다.”


“알았어. 그럼 추운데 얼른 들어가 봐. 이 신발 가지러 내일모레까지 꼭 오고. 알겠지?”


“네, 언제나처럼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구둣방 문턱을 넘어선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지만, 다음번에 이 문턱을 넘어서는 것은 마지막이 될 테다. 십년여의 시간 내내 사장님께 도움을 받아 내게 소중한 걸 계속 애지중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엔 나도 사장님과 그분께 소중한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하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루라도 얼른 가방다방의 사장님께 연락이 오길.




본 단편 소설은 연작 소설 <이십사야> 중 여섯 번째 편입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매일 한 편씩 업로드되며, 총 24편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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