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일곱째 날
우린 그렇게 대단히 오순도순 사이가 좋기만 했던 부부는 아니었어. 때로는 투닥투닥 다투기도 하고, 서로에게 토라져서 등을 마주하고 잔 날도 여러 번 있었지. 좋은 의도로 하는 거짓말이라면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진실을 생략하거나, 요리조리 구부려 말한 날도 있었고. 늦둥이로 딱 하나 낳은 자식인 보미를 낳고 나서는 또 얼마나 많이 투닥거렸는지. 애 보기 힘든 마누라한테 모든 걸 다 맞춰줘도 모자랐을 판에 말이야. 진짜 모자란 건 나였어. 내가 보미 더 많이 봐주고, 우리 마누라 고순호 씨도 더 많이 봐주고 그랬어야 했는데. 뭐 나이만 많았지 하는 건 유치허고 이기적이기 짝이 없어서, 마누라는 일도 하고 애도 보는데, 나는 일이 끝나면 하루가 고되었다고, 친구들을 만나 소주 한 잔을 찌끄리고 집에 돌아가기도 했어. 돌이켜서 바꿀 수 없는 발자국인데, 그래도 후회가 돼.
거기다 또 우리 마누라가 처음 유방암 판정을 받고 치료받을 때는, ‘거 뭐, 말기도 아닌데 금방 낫겠지' 하며 안 그래도 아픈 사람 속을 후벼 팠어. 내가 그런 놈이었어. 젊었을 때 좋다고 따라다녀 놓고, 나이 먹고 왜 그랬나 몰라.
가끔 우리 둘이 손을 잡고 길거리를 걸어가면 뒤에서 젊은 사람들이 ‘어머, 저분들 좀 봐. 나도 나중에 나이 먹고 남편이랑 저렇게 꼭 다정하게 손 잡고 걷고 싶다'라고 할 때가 있어.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지. ‘거 보기엔 좋을지 몰라도, 내가 젊은 시절에 우리 마누라 속을 얼마나 썩였는데. 속 좋은 소리 하지 마소!’
내 나이 일흔이 넘었고, 아내도 이제 곧 일흔이야. 여태껏 우리 마누라한테 못 해준 것들 이제라도 잘해주라는 경종인가 봐. 이런 경종이 없이도 내가 잘했어야 했는데. 전에 친구 놈 하나 따라서 성당에 가 본 적이 있었거든. 근데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동안 다들 가슴을 주먹으로 탕, 탕 치면서 ‘제 탓이오, 제 탓이오, 모두 저의 탓이옵니다'라고 외는 거야. 난 하느님이고 종교고 잘 몰라. 근데 그거 하나는 내가 잘 알지. 우리 마누라가 이렇게 다시 고생하는 건 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모두 나의 탓이야.
마누라가 없을 때 우리 딸내미 보미가 한 번 쓱 이렇게 말하더라? “으휴, 좀 젊었을 때도 이렇게 잘하시지 그랬어요. 누가 보면 평생 공처가였는 줄 알겠네.” 너무 맞는 말이라서 반박도 못해. 그냥 “평생 공처가였던 것 같다는 말 들을 자격 있을 정도로 남은 생 세상 제일가는 애처가로 살런다” 이러고 말지. 그럼 또 우리 똑순이 딸내미가 이래요. “아빠 지금 하신 말씀 제대로 지키시나 제가 아주 두 눈 번쩍 뜨고 봅니다.” 그러면서 무슨 달 아래 먹잇감을 발견한 부엉이처럼 그 큰 눈알을 부라리며 날 감시한다니까. 지 엄마 아껴서 그런 거고, 우리 둘 잘 살았으면 하는 자식 마음인 건데 내가 거기다 뭐라고 하겠어. 그냥 다시 외는 거지.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모두 나의 탓이오.
내가 해야 하는 몫의 많은 부분을 아직도 보미가 많이 해. 지 엄마 병원 다니는 것도 아빠랑 둘이서만 보내기 불안하다고, 친구한테 자기 일 좀 봐달라고 부탁하고 꼬박꼬박 엄마랑 같이 병원 다녀오고. 나도 물론 따라가는데, 나야 그냥 보디가드 겸 심부름꾼이지. 의사 양반한테 질문하고 그러는 거, 우리 똑 부러지는 딸이 다 한다고. 공책 하나 가지고 다니면서 의사 양반이 하는 소리, 자기가 물어보고 싶은 거 아주 꼼꼼하게 적어두더라고. 우리 마누라의 증세 같은 것도 날짜별로 아주 철저하게 기록하고. 우리 마누라도 보미가 있어서 더 안심할 거야. 나는 무슨 질문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그래서..
오늘도 그렇게 병원을 다녀왔어. 나는 일평생 구두 일만 해서 구두만 알지 의학은 하나도 모르는데, 우리 장한 딸내미는 의사도 아니면서 의사가 하는 소리를 다 너무 잘 알아들어. 누구 딸인지 정말. 그래서 병원 예약이 끝나고 헷갈리는 게 있으면 내가 보미한테 다 물어보지. 보미 말로는 재발한 거 자체는 긍정적인 게 아니지만, 치료 잘 받으면 괜찮을 것 같대. 병의 증세가 빨리 악화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치료도 덜 독한 치료를 받아도 될 것 같대. 그래도 “무조건 노 스트레스! 아시겠죠! 절대적으로 노 스트레스예요 노 스트레스!”하고 나에게 단단히 당부를 해.
오늘은 병원 예약 관련된 것 말고도 보미랑 둘이 좀 할 얘기가 있어. 그래서 우리 마누라 목욕하라고 따뜻한 물을 받아주고, 마누라가 목욕을 하며 몸을 녹이는 사이에 보미하고 얘길 나눴지.
“딸, 아빠가 또 할 얘기가 있는데.”
“뭐요?”
“어제 구둣방에 단골손님 한 분이 다녀가셨거든. 거 뭐, 행사 기획하고 홍보하고 그러는 사람인데 그분 학생 시절부터 내가 10년이 되도록 구두를 고쳐드렸어.”
“그렇게 오랜 단골손님이 있다니, 아빠가 능력자이신 건지 손님이 고지식한 건지 모르겠네?”
“이 녀석 말버릇 하고는.”
“아빠 구두 수선 솜씨야 우주 최고죠. 그래도 손님을 십 년간 단골로 모신다니, 아빠 대단하셔요. 나도 십 년 뒤에 우리 가방다방 와줄 단골이 생길 수 있으려나?”
“그러니까 뭐 하나 내놔도 정성을 다해서, 프로 같이 내놔야 되는 거야. 차 한 잔도.”
사실 이런 소리 하나 안 해도 알아서 잘할 보미야.
“하여간에. 그 손님이 가방다방 좋아하는데, 너랑 뭐 같이 하고 싶다네? 내가 근데 또 어떻게 너 연락처를 아무나한테 주겠어. 아무리 단골손님이어도 우리 귀한 딸인데. 칼자루는 우리 딸이 쥐어야지. 그래서 내가 손님 연락처를 너한테 줘서 너더러 연락하라 하겠다 그랬어. 근데 니가 싫다고 하면 나도 어쩔 수 없다고.”
“뭔데요? 같이 하고 싶다는 게?”
“글쎄 나야 모르지. 여기 연락처 있으니까 연락해보고 싶으면 하고, 아니면 말어.”
“아니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연락을 하라고 참. 이 이재원씬지 뭔지 하는 사람도 답답한 양반일세.”
“근데 뭐 아빠는 구두 대하는 것 보고 사람 보잖어? 삐뚤어진 사람은 아닌 것 같어. 근데 니 하고 싶은 대로 해.”
“알겠어요. 제가 생각해볼게요.”
이렇게 짧게 다른 얘길 하고 나머지는 다 자기 엄마 얘기야. 치료받는 동안 운동은 어떤 걸 얼마나 자주 하면 좋고, 잠은 몇 시에 얼마 동안 자고, 음식은 뭘 먹어야 좋고. 아주 이판사판 해가지고 무조건 이번엔 이 암이라는 놈을 영영 때려눕히자고.
우리 보미가 그렇게 멋진 자식이야.
목욕하던 마누라가 보미를 불러. “보미야, 와서 엄마 등 좀 밀어주련?”
그럼 보미는 또 세상에서 가장 상냥한 목소리로 “네 갈게요"하며 엄마에게로 향하지.
하여간에 나만 잘하면 돼. 나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