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여덟째 날
나는 그 말 믿어요, 내 나이 일흔 다 됐어도 아직 꽃청년이라는 말. 며칠 전에 남편이 어디서 주워 온 소린지 나한테 그러는 거야, “우리 마누라 꽃청년인 우리 마누라, 아주 꽃같이 예쁘네.” 들을 땐 남사스럽게 무슨 소리냐고 했는데, 그 말 맞지 왜.
내가 막 스무 살 때처럼 펄펄하고, 좋아하는 사람 생각하면 설레서 차마 잠을 이룰 수 없고, 뭐 그런 게 아니고. 난 아직도 해보고 싶은 것이 많고, 그걸 하나하나 해내고 싶은 의지도 확고해요.
난 이번 겨울에 꼭 차도, 고층 건물도, 오물도, 아스팔트까지도 다 안아주는 눈을 보고 싶어요. 멀리 설원을 보러 가지 않아도 돼요. 그냥 눈송이 큰 함박눈이 세상에 고요라는 노래를 불러주는 것을 보고 싶어. 작년에 한 번 그렇게 눈이 내렸는데, 일하느라 바쁘다고 성가시게만 생각했지 뭐야. 우리 딸 보미랑 손 잡고 음악회도 가고 싶고. 남편이 서툴러도 정성을 듬뿍 담아서 만들어준 시원한 굴국도 먹고 싶어. 배가 터질 것 같을 때까지. 젊었을 때는 일하느라 바빠서 못 읽은 책이 많아요. 근데 내가 학교 다닐 때 별명이 문학소녀였거든. 여태 못 읽은 책도 다 읽고 싶어. 그리고 그 책 얘기를 친구들이랑, 우리 똑똑한 딸 보미랑도 하고 싶어.
실은 보미가 나더러 병 치료는 몸만 하는 게 아니라 마음도 같이 해야 하는 거래. 그러면서 마음 상담 치료를 받아보라고 했는데, 내가 싫다고 했거든. 생판 모르는 남을 만나서 속을 털고 싶진 않았어요. 듣는 사람은 무슨 죄야. 얼마나 힘들겠어. 내가 가서 가족들한테 하나도 못하고 꽁꽁 숨겨뒀던 이야기보 펼쳐봐. 그러면 듣는 사람은 고역이지. 내가 하도 완강하게 안 하겠다고 하니까, 우리 딸 보미가 그러면 엄마 책도 좋아하고 원래 글 쓰고 싶어 했으니까 시나 수필 쓰기 수업이라도 들어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동네 서점에 가서 이렇게 조금씩 글 쓰는 방법을 다 배우고 있네. 세상이 참 재밌어졌어. 예전에도 이런 게 있었나? 내가 일하느라 바빠서 몰랐나?
쓰고 싶은 마음만 있었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글짓기 선생님께 여쭤 봤더니,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그냥 말하듯이 써보는 것이 첫 단계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써보는 거지. 선생님이 그랬어, 너무 자기 자신에게 ‘이건 써도 된다, 이건 쓰면 안 된다'하지 말고 일단 솔직하게 써보라고.
병 치료를 하느라 약을 먹고 그러면 피곤해서 사실 생각이 대단히 많진 않아요. 예전엔 일할 때 계속 반복적인 작업을 하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긴 했지.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나. 시간에는 시작과 끝이 있나. 시간에 시작과 끝이 있다면 나는 어디쯤에 있는 걸까. 근데 뭔가 딱 이거다, 하는 명징한 답은 찾은 적이 없어요. 그냥 계속 궁리만 했지.
시간은 어떤지 몰라도, 지금은 오늘의 시작과 오늘의 끝 어딘가에 있고, 내 생의 끝이 언제인진 몰라도 시작과 끝 사이라는 건 확실히 알지요. 아픈 것도, 기쁜 것에도 끝이 있으리라는 것. 그런데 아직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많아요. 코 끝 차갑게 하는 날 우리 딸 보미가 내려주는 뜨끈한 커피. 그 커피에 올라간 보들보들한 우유 거품. 보미가 틀어놓은 음악을 들으며 발을 살랑살랑 움직이며 박자를 맞추는 우리 남편. 눈을 뜨면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햇빛.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길거리에 피어있는 불빛들.
그래서 나는 끝과 멀어질 테예요. 아직은 더 이 삶을 즐기고 싶어.
내일 아침엔 우리 보미가 어떤 음악을 골라 틀어놓을지, 우리 남편이 그 서투른 솜씨로 뭘 아침 식사라고 만들어줄지 궁금해. 그러니까 나 열심히 치료받을 거예요. 몸도 마음도.
끝과 멀어질 거야. 나 고순호라는 천지화 (天指花), 계속 피어날 거야.
본 단편 소설은 연작 소설 <이십사야> 중 여섯번째 편입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매일 한 편씩 업로드 되며, 총 24편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