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이십사야

계획을 구워내는 시간

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아홉 번째 날

by 다정

아직 미한텐 얘기하지 못했다. 미도 이해해주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개인사는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조금 상황이 정리되고서야 입을 뗄 수 있는 이야기이므로. 이제는 슬슬 해봐도 좋을 것 같은데, 타이밍이 문제다. 아무런 맥락 없이 불쑥 꺼낼 수 있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니까.


근데 하필이면 오늘은 한참 구움 과자를 구워내야 하는 날이다. 그냥 맨날 굽던 것이나 굽지, 나는 왜 또 일을 벌여서 여러 종류를, 그것도 그중 몇 가지는 처음 구워보는 종류의 과자를 골랐는지. 일을 좀 단순하게 하면 편할 텐데 정말 내가 나 자신을 괴롭히는 거다.


거기다 아빠로부터 전달받은 명함도 어찌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고. 나는 일단 간단하게 문자를 보내보기로 했다.


- 안녕하세요, 가방다방의 윤보미입니다. 아버지 통해서 명함 전달받았습니다. 제가 메시지로 길게 얘기 못하는 타입이라서요. 저희 카페로 한번 오시죠. 언제 시간 되세요?


문자를 보내 놓고 나는 전쟁터로 향한다.


오늘 구울 과자는 누구나 좋아할 초콜릿 칩 쿠키 (하지만 나는 거기에 일본식 미소 된장을 살짝 첨가해서 짭조름함과 고소함을 배가시키곤 한다),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잣이 들어가고 밀가루 대신에 아몬드 가루와 달걀흰자를 넣어 글루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먹기 좋은 이탈리아식 쿠키 피뇰리, 진저브레드 쿠키 (이건 클래식한 쿠키라서 덧붙일 말이 많지 않다), 그리고 화이트 초콜릿 디핑을 입힌 라벤더 쿠키다. 초콜릿 칩 쿠키야 여러 번 해봤고, 피뇰리도 우리 카페의 클래식한 아이템이. 진저브레드 쿠키야 여태 구워오던 과자들과 많이 다르지 않아서 큰 노고를 들이지 않아도 된다.


요주의 타깃은 화이트 초콜릿 디핑을 입힌 라벤더 쿠키다. 사실 쿠키 자체는 쇼트 브레드 반죽에 건조된 라벤더를 첨가하는 것이라 어렵지 않다. 문제는 내가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고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눈처럼 하얀 화이트 초콜릿 디핑까지 계획했다는 것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을 것 같은데, 진열대에 올라갈 모습을 상상하면 욕심을 부리지 않을 수가 없다. 밖에 눈이 쌓이지 않으면 하얀 쿠키라도 있어야지.


나는 일을 할 때 음악이 없으면 견딜 수가 없다. 누군지 몰라도 조상님들 중 노동요가 없으면 모내기 못 하겠다고 뻐팅기는 분들이 계셨던 것 같다. 평상시에는 아무리 바쁘다 한 들 그래도 잔잔한 축에 속하는 음악을 듣는데 오늘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으로 시작한다. 그래야 손도 발도 바삐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뭐예요, 사장님. 오늘 아주 아침부터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이 음악은 뭐죠? 중학교 음악 시간에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요?”


아무리 음악에 큰 관심이 없는 미라고 해도 이런 변화를 못 느낄 수는 없지.


“오늘 아—-주 아주 바빠요. 부엌에서 과자 굽기 조수 할 거 아니면 컴퓨터로 확인 바람!”


나는 미에게 정성 들여 답을 할 여유조차 없다. 아빠를 닮았으면 내가 손이 좀 빨랐을 텐데 나는 정확한 대신 빠르진 못하다. 아빠는 빠르기도 하시고 정확하기도 하시고. 유전자를 절반만 받아서 그런지 아빠의 손재주의 절반만 닮은 셈이다. 구움 과자 네 종류를 구워내려면 아주 바삐 움직여야 한다. 한참 동안 재료를 계량하고, 섞고, 반죽을 밀대로 밀고, 쿠키 틀을 사용해서 잘라내고, 쿠키를 오븐에 넣을 차례였다. 아 그런데 이런 초심자 실수를 하다니, 오븐 예열은 왜 미리 안 해둔 거야. 예열부터 다시 하려 하는데, 미가 날 불렀다.


“사장님, 여기 사장님 찾는 분 오셨는데요?”


나는 부엌 밖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절 찾으시나요?”


“안녕하세요, 이재원입니다. 제가 문자를 드렸는데 답이 없으시기에 커피라도 한 잔 하려고 들렀어요.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아니 시간 언제 괜찮으시냐 여쭤봤는데 이렇게 바로 찾아오실 줄은 몰랐네요.”


“아, 저도 회사가 이 근방이라. 커피도 마실 겸 해서요.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일단 커피 한 잔 하고 계실래요? 시간 괜찮으시면. 제가 지금 잠깐 뭘 마무리해야 되어서요.”


“네, 제가 한 시간 뒤에만 사무실 들어가면 돼서요. 그럼 커피 마시고 있을 테니 천천히 나오시죠.”


나는 주방으로 후다닥 들어가 오븐을 예열시키기 위해 온도와 타이머를 맞춰둔다. 15분 뒤에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와서 쿠키를 오븐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다시 밖으로 나왔다.


“드디어 이렇게 뵙네요. 아버님께서 따님 자랑을 얼마나 하시던지. 그리고 여기 커피 정말 맛있네요. 여태껏 밖에서만 얼핏 원두향을 맡아봤는데, 왜 오늘에서야 문턱을 넘었나 모르겠네요. 항상 지나가면서 공간도 참 멋진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이 커피는 참 하루 행복하게 시작할 수 있는 그런 맛이네요.”


“낯간지러운 멘트는 생략하셔도 되고요. 재원 씨도 출근길이고, 저도 지금 길게 얘기할 순 없어서요. 본론만 얘기해주시겠어요?”


옆에서 미가 뭘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냐며 눈치를 준다. 미가 맞긴 하다. 손님이기도 하시니까.


“죄송해요, 제가 오늘 좀 마음이 급해서. 무슨 용건이실까요?”


“아 다름이 아니라, 사장님께 어머님 얘길 들었어요.”


“저희 엄마요?”


미가 아무것도 안 듣는 척하면서 귀를 쫑긋하는 것이 느껴진다. 이따 해명의 시간을 가져야 하겠군.


“예, 이번 크리스마스에 꼭 눈을 보고 싶어 하신다고. 근데 혹시 일기예보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크리스마스 눈이 안 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눈도 크리스마스도 정말 좋아하거든요. 밖에 눈이 오든 안 오든 우리가 어머님께 정말 영화처럼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선사해드리면 어떨까요? 여기 가방다방에서.”


이 사람 뭐지? 왜 다른 사람 가정사에 끼어들어서. 아무리 아빠의 단골이라지만 생판 모르는 남이.


그러다 갑자기 “저는 항상 낯선 이의 친절에 기대왔답니다"라고 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속 블랑쉬 드 보아의 대사가 떠올랐다. 블랑쉬만큼은 아니어도 조금은 타인에게 기대 봐도 좋지 않을까.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인지 좀 더 들어보고 싶네요. 바로 확답을 드릴 순 없고요.”


“그럼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원래 연말이나 삘이 꽂히면 사람들이랑 여럿이서 모여서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하거든요. 혼자도 좋지만 여럿일 때가 좋은 시간도 있는 법이잖아요?“


그렇게 오븐이 준비되는 동안 우리는 크리스마스 계획을 예열하게 됐다. 오늘 구우려는 쿠키만큼 달콤한 크리스마스가 되길 바라며.






본 단편 소설은 연작 소설 <이십사야> 중 아홉 번째 편입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매일 한 편씩 업로드되며, 총 24편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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