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이십사야

오늘은 Open

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열 번째 날

by 다정

“자수해서 광명 찾아"라고 할까 하다가 말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보미는 오븐 타이머를 맞춰두고는 다시 홀로 나와서 “허브 차 마실래? 캐모마일도 있고, 페퍼민트도 있는데"라고 물었다. 보미는 진지하게 할 말이 있으면 꼭 커피가 아닌 음료를 내온다. 물이나 캐모마일 차 같은 것. 이야기를 듣는 상대가 카페인으로 감정의 폭을 더욱 키우지 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다 보니, 분명 보미도 이게 나에게 일종의 시그널이 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래도 매번 이러는 걸 보면 본인에게도 마음을 한 번 여과할 시간이 필요해서 일 것이다.


“허브 차 좋지, 난 둘 다 좋으니까 너 땡기는 걸로 마시자.”


나도 모르게 사장님이라는 호칭을 내려놓았다.


“그럼 겨울이니까 페퍼민트 마시자.”


보미는 주전자에 물을 올려놓고는 카페 문에 “Open”이라고 해두었던 표지판을 “Closed”로 뒤집어둔다. 양면이니 우리에겐 그게 ‘오픈'이라고 보인다. 가게는 잠시 닫지만 마음은 오픈하는 그런 시간이 되는 거다.


“미야, 나 할 말이 있는데.”


응 알아. 너 나한테 얘기 안 하고 속으로만 앓고 있었던 이야기 있는 거. 네가 꼬박꼬박 구워서 채워두는 구움 과자도 제때 굽지 못할 그런 사정이 있는 이야기인 거. 아까 다녀간 재원 씨라는 남자가 슬쩍 언급한 것처럼 너희 엄마 이야기인 것도 다 알아.


“미안해.”


보미는 페퍼민트 찻잔을 내 앞에 놓으며 미안하단 이야기부터 했다.


“미안하긴 뭘.”


“제일 친한 친구라고 하면서, 아무런 얘기 못해서 미안. 실은 우리 엄마 전에 앓으셨던 유방암 재발했거든. 근데 얼마나 상황이 안 좋은 건지,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다 엄청 최근에 결과가 나온 거라서 너한테 이야기할 여유가 없었어. 좀 상황이 정리되고 얘기하고 싶었어. 나도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너한테 속보처럼 짤막 짤막하게, 불명확하게 소식을 이야기하고 싶진 않더라고.”


계속 내 눈을 보며 이야기하다가 보미는 양손을 찻잔에 가까이하여 손을 데우며 시선을 자꾸 아래로, 아래로 향했다.


“어머님 아프시다니, 너도 그렇고 아버님도 그렇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어. 그 정신없는데 뭐 나까지 신경을 써. 너 편하고, 마음의 준비됐을 때 하면 되는 얘긴데. 친구 좋은 게 뭐라고. 그리고 네가 뭐 유튜버나 인플루언서도 아니고 어떻게 근황을 실시간으로 모두에게 업데이트하냐?”


“네가 ‘모두'는 아닌데, 나도 너한테 더 일찍 말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어. 미안하고,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래도 우린 좋은 이야기만 하는 그런 사이는 아닌 거잖아. 속상한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의 어깨에 기댈 수 있는 그런 친구 사이인 거잖아. ‘이야기해줘서 고마워’라는 말이 머리와 입 안에서만 맴맴 돌았다. 낯간지러운 말도 서슴없이 하고 싶을 때 하기가 나의 새해 목표인데, 아직 2022년이 다 가지 않아서인지 제깍 나오질 않는다.


“지금 내가 중요하니, 너희 어머니 쾌차하시는 게 중요하지.”


“고마워, 엄마 치료 잘 받으시고 계셔. 불행 중 다행이라고 그래도 이번에 좀 일찍 캐치하기도 했고 일단은 수술이나 항암은 안 하고 호르몬 블락커 복용하는 방법으로 치료하면서 예후를 보기로 했어. 항암이 힘들다고 해서 많이 걱정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지 정말.”


“내가 뭐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어? 이 참에 쿠키 굽는 거 내가 전수받아서 너 대신 좀 할까? 너 다른 거에 신경 잘 쓸 수 있게?”


“오, 우리 바리스타 선생님! 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특한데! 어머 내 정신 좀 봐. 잠깐만 미야.”


보미는 아마 스마트 워치에 타이머를 맞춰두고도 이야기하느라 오븐 속의 쿠키를 깜빡한 모양이었다. 보미는 한 달음에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 문이 열리자 홀까지 달큼한 향이 쏟아져 나왔다.


“과자의 신의 가호가 있었는지 다행히 제시간에 꺼냈어. 하나 먹어. 원래 이럴 때가 제일 맛있잖아.”


치과 가는 것을 그 어떤 것보다도 무서워하는 나도 안 먹겠다고 할래야 할 수가 없는 보미의 초콜릿 칩 쿠키. 오븐에서 갓 나와서 다크 초콜릿 칩이 손가락에, 혀에 닿자마자 손가락 끝의 눈송이처럼 사르르 사라졌다. 아지렁이처럼 일렁이는 파도가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환희의 눈물 같은 짭조름함.


“다른 건 몰라도 이 짠맛의 비밀은 좀 알고 싶은데.”


“영업 기밀입니다, 바리스타 선생님. 며느리도 몰라요, 며느리도 몰라. 아시고 싶으시다면 기밀유지 각서 쓰시고 주방으로 들어오셔야 합니다.”


“그러면 주방에서의 마법은 제게 좀 전수해주시고 사장님께서는 주방 밖에서의 마법을 좀 부려보시지요.”


“너 진짜 배울 거야? 진짜 구울 거야?”


“그 재주 많은 손 부엌에서만 쓰지 말고, 엄마 어깨도 마사지해드리고. 힘드시다 할 때 손도 잡아드리고 그렇게 써. 부엌에서 부려야 할 마법은 내가 배워서 좀 해볼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잖아. 아니 하다 못해 쥐인 미키마우스도 판타지아 이런 거 보면 마법 배우던데, 인간인 내가 단디 마음먹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잠깐 보미의 눈가가 반짝였다. 저게 쿠키의 비밀 일리는 없는데.


“오, 마음먹었다 이거지? 알았어. 들어가자, 그럼.”


“근데요 스승님 저 쿠키 하나만 더 먹으면 안 돼요?”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던데, 염불을 배우기 전에 잿밥을 든든히 먹어야지. 산지직송으로 주방에서 바로 드시죠. 들어오세요!”


오늘은 서로의 마음도 open, 부엌도 open이다.





본 단편 소설은 연작 소설 <이십사야> 중 열 번째 편입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매일 한 편씩 업로드되며, 총 24편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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