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열한 번째 날
평생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기회는 한순간에 기습적으로 찾아오나 보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어제까지 멀쩡하게 무대 위에서 행복하게 춤을 추던 선배가 부상을 꽤나 심하게 입어서 오늘 공연을 할 수 없다는 소식이 들렸다. 발레단 내부의 휴무 규정에 따라 나보다 경험이 더 많은 선배들도 공연을 할 수 없는 상황.
그렇게 절대로 생기지 않을 줄 알았던 일이 생겨버리고야 말았다. 계속 폴폴 날리는 눈송이 중 하나의 역할만을 하고 있던 나에게 솔리스트 역할이 덜썩 찾아오고야 말았다. 만약의 경우를 위해 언더스터디*로 역할을 익혀오긴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데뷔하게 되다니. 말이 ‘언더스터디’이니 나는 평생 스터디만 하다 끝날 줄 알았다.
- 미 씨, 저 오늘 갑자기 솔리스트 역할 데뷔하게 됐어요.
- 헉, 좋은 소식 아니예요?
- 잘해야 좋은 소식일 텐데요 ㅠㅠ 갑자기 공연하려고 하니까 좀 겁나요.
- 하얀 씨 분명 잘할 거예요! 제가 어떻게든 공연 보러 가볼게요, 응원하러!
- 감사해요ㅠㅠ 저 이제 가봐야 해요. 또 연락할게요!
이미 무대 리허설도 다 끝난 시간에야 공지를 받은 거라 어찌해야 할지 몰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하얀! Shall we go over your Marzipan variation (너 공연할 마지팬 베리에이션 연습해볼까)?”
“Yes, yes, please help me, Angelo. (네, 네 저 좀 도와주세요 안젤로 선생님)”
이런 걸 보면 안젤로 선생님은 영락없는 츤데레다. 계속 나더러 아라베스크 말아먹지 말라고 해놓고서 이렇게 또 도움이 필요할 때는 튼튼한 동아줄이 되어주시고. 선생님께선 자기 쉴 시간을 희생해서, 무대 리허설도 못 해보고 데뷔를 해야 하는 나를 위해 내가 동선과 마지막 체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진짜 감사해서 어쩌나.
“Beautiful. You’re gonna make one fine Marzipan Sherpherdess, 하얀. As Mr. B said, just see the music, hear the dance. In bocca al lupo! (너무 잘했어. 우리 하얀이 마지팬 리더 역 잘할 거야. 발란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음악을 보고, 춤을 들어. 행운을 빌어!)”
“Viva al lupo! Thank you, Angelo! (안젤로 선생님 행운 빌어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께서 열심히 봐주시고, 나도 짧은 틈이라도 무대 위에서 점검해볼 수 있어서 좋았지만 오늘이 솔리스트 역 데뷔라고 생각하면 손바닥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이 작품은 유달리 발 끝으로 해야 하는 동작이 많은지라 오늘 챙겨 온 토슈즈들 중에 비교적 생생히 살아있는 페어로 골랐다. 말캉한 것으로 춤을 췄다가 2분 30초 남짓하는 짧은 춤이라 할지라도 그 와중에 토슈즈가 흐물흐물해질 수도 있으니까.
발란신** 작품을 할 때마다 안젤로 선생님께서 인용하시는 발란신의 말을 곱씹는다. 음악을 보고, 춤을 들어라.
솔로 역할을 데뷔하는 순간은 또렷하게 기억에 남을 줄 알았다. 공연 전, 의상을 평상시와 다른 의상을 입었다는 것, 그리고 선배의 의상이 운이 좋게도 나에게도 잘 맞았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기억이 남지 않는다. 선배에게 민폐가 되지 않게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도 컸다.
내 차례의 음악이 흘러나오자, 그저 음악에게 내 몸을 맡겼다. 연습실에서 연습할 땐 발에 불이나는 것 같더니, 무대 위에 서자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눈송이 왈츠를 출 때는 사방에 위치한 열다섯 명의 동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지가 되었지만, 군무를 이끄는 솔리스트의 역을 하려니 모든 걸 혼자, 내가 이끌어나가야 했다. 눈송이 중 한 명이 아니라, 마지팬 리더는 방하얀, 나 혼자다. 칭찬도 비판도 오로지 내 몫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진짜 내 몸뚱이가 커튼콜까지 마친 것은 맞는 것일까? 모두가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쳐 들떠하는 가운데, 안젤로 선생님께서 제일 먼저 내게 다가오셨다.
“Bellissima***, 하얀. 너무 예뻤어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Go! Enjoy the night! (가! 이제 오늘 밤을 즐겨!)”
안젤로 선생님께서는 내 볼에 키스해주셨다. 이래 놓고 또 내일 코렉션을 잔뜩 주시는 것 아닌가 무섭긴 한데, 그래도 일단 오늘 아주 ‘말아먹'지는 않은 모양이다.
출연자 입구에서는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하얀 씨! 오늘 정말 최고였어요!”
“미 씨, 어떻게 오셨어요! 오늘 티켓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누가 중고 표를 팔길래 현장 거래했어요. 하얀 씨 덕에 아주 새로운 경험을 했네요. 근데 그보단 오늘 하얀 씨 마지팬 춤추시는 것 보고 정말 감격했잖아요. 어쩜 그렇게도 아름다우시던지! 발레가 이렇게 아름다운 춤인 줄 몰랐어요. 하얀 씨가 그냥 음표던데요? 사람이 아니라 음표인 줄 알았어요.”
미 씨의 눈에 저리 보였다니, 발란신의 작품에 욕되지는 않게 춤춘 모양이다.
“그리고 이거. 선물이예요. 마지팬이 분홍색 의상 입고 나오는 것인 줄 알았으면 분홍색으로 만들어올 걸.”
미 씨는 내게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화이트 초콜릿이랑 라벤더 들어간 쿠키예요. 저희 카페 사장님 레시피인데, 제가 하얀 씨 연상시키는 코코넛을 솔솔 뿌려서 첨가했어요. 당 충전 필요하실 때 드시라구요.”
“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완전 감동이예요.”
“감동은 무슨, 하얀 씨 춤이 감동이죠. 진짜 너무너무 멋있었어요. 하얀 씨 여기 인사해야 할 분들 많으신 것 같아서 저는 이만 가볼게요. 오늘 고생 많으셨고 이따 집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미 씨랑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미 씨는 인파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미 씨의 뒷모습을 잠시 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내 치마 자락을 톡톡 두들겼다.
“저기요, 저도 사인해주세요.”
분홍색 발레리나 튜튜를 입은 어린아이였다. 혹시 내가 아니라 수석 선배의 사인을 받고 싶은데 날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는 건 아닐까?
“저요? 저기 주역하신 분도 계시는데.”
“마지팬 선생님 사인받고 싶어요.”
꼬마는 자기가 원하는 게 분명했다. 꼬마의 어머님이 “선생님 피곤하시게 하면 안 돼"하며 꼬마를 말렸다.
“아니예요, 하나도 안 피곤해요. 어디에 사인해드릴까요?”
복 받은 직업이고, 복 받은 하루다. 내가 사랑하는 춤을 관객과 나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또 사랑을 받다니. 발과 온몸이 욱신 거려도 오늘 밤은 행복에 젖어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언더스터디: 대역 (본 역의 무용수가 불가피한 사유로 공연할 수 없을 때 대신하는 무용수)
**발란신: 풀네임은 조지 발란신으로 뉴욕의 뉴욕시티발레단을 창립한 러시아계 안무가이다. 20세기 발레계를 호령한 안무가 중 한 명이고, 미국 발레의 스타일을 ‘발란신 스타일'로 도장 찍은 안무가다.
***Bellissima: 이탈리아어로 아름답다는 뜻
본 단편 소설은 연작 소설 <이십사야> 중 열한 번째 편입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매일 한 편씩 업로드되며, 총 24편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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