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이십사야

누가 내 오렌지 주스 훔쳐갔어?

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스무 번째 날

by 다정

무슨 변태의 짓인가? 아니면 나를 미워해서 골려 먹으려는 동료? 내 오렌지 주스가 사라진 것이 이번 달에만 네 번째이니 이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어제 미 씨가 공연에 찾아와서 승급을 축하해줘서 기분 좋았지만, 이 사건이 내 일상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마냥 기쁘기만 할 수 없어서 왠지 더 섭섭하다. 정말 호사다마인 것일까?


처음에 오렌지 주스가 사라졌을 때는 내가 실수로 어딘가에 두고 온 줄 알았다. 흔하디 흔한 물건이고, 작은 것이니 내가 어디에 슬쩍 두고 왔어도 충분히 모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오렌지 주스가 사라졌을 때는 내가 도대체 왜 이렇게 칠칠맞은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것은 잃어버리지 않는데 유독 오렌지 주스만 자꾸 사라지니 희한하지 않다 할 수가 없었다.


세 번째 오렌지 주스가 사라졌을 때는 진짜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액땜도 아니고, 건망증도 아닌 것 같은데. 유독 공연 대기실에서 오렌지 주스만 사라지니 이게 무슨 노릇이란 말인가. 그래도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아주 성심을 다 해서 오렌지 주스를 챙겼다. 편의점에서 오렌지 주스를 사고 제대로 가방에 넣은 뒤, 가방 지퍼를 잠갔는지 체크. 공연장 대기실에서 바닥 같은 곳에 오렌지 주스병이 널브러져 있지 않도록 하고, 화장대 책상에 올려두었는지 체크.


그런데도 또 오렌지 주스가 사라졌다. 추리 소설의 여왕이라 불리는 아가사 크리스티가 그랬다, 한 번은 우연이고, 두 번은 단서고, 세 번은 증거다. 누군가가 내 오렌지 주스를 시시 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다.


엊그제, 네 번째 오렌지 주스가 사라지니 이건 누군가의 소행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 더러 발생한 비싼 연습용 레오타드 도난 사건은 들어봤어도, 오렌지 주스 도난이라니. 내가 안 마신 것을 가져가기도 하지만 마신 것을 가져가기도 하는 것을 보면 무슨 변태의 소행이란 말인가? 이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동료들을 의심과 역겨움의 눈초리로 보게 되어 괴로웠다.


같은 공연 대기실을 사용하는 선배 연지 언니는? 절대 아니다. 연지 언니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얼마나 곧은 사람인데. 뿐만 아니라 언니는 체형 관리를 위해 평상시에 액상 형태의 탄수화물이라면 절대 섭취하지 않는다. 그러니 언니를 의심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도대체 누가 남이 마시던, 혹은 마시려고 가져다 놓은 오렌지 주스를 자꾸만 훔쳐 간단 말인가? <호두까기 인형> 속의 쥐새끼들이 현실에 나타나기라도 한 것일까?


어제도 분명 누군가가 나의 오렌지 주스를 노릴 것 같아서 어제는 오렌지 주스 대신에 초콜릿 우유를 사 와봤다. 범인은 초콜릿 우유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오렌지 주스를 노리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근데 도대체 우리 발레단에 이 기성품 오렌지 주스 한 병을 사지 못하여 내 오렌지 주스를 훔쳐가야만 하는 사정의 사람이 있기는 한단 말인가?


오늘은 무조건 범인을 잡기로 마음먹었다. 초콜릿 우유 대신 오렌지 주스를 샀다. 이전처럼 연습실 화장대 위에 올려두고 클래스도 다녀오고, 분장도 받으러 다녀왔다. 그때까지도 오렌지 주스는 제자리에 멀쩡하게 있었다. 공연 전 저녁 시간에 내가 잠시 커피를 마시거나 화장실을 가려고 자리를 비운 틈에 범인이 왔다 가는 것일까?


나는 선배 언니에게 저녁을 잘 먹고 오라고 인사한 뒤, 대기실 화장실 문 뒤에 숨어있었다. 공연이 두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뭐 하는 것인가 싶어서 한심하긴 했지만 그래도 찝찝함을 무조건 해결하고 싶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대기실 방문을 열었다. 연지 언니의 발걸음 소리가 아니었다.


“야, 뭐야 밀지 마.”


“야 조용히 해. 걸리면 큰일 나. 조심조심!”


“이거 맞지?”


범인들의 목소리이렸다! 나는 범인을 범죄 현장에서 바로 발각하기 위해 화장실에서 튀어나왔다.


“뭐예요! 남의 오렌지 주스 왜 훔쳐요!”


소리를 지르고 보니 범인은 한 명, 두 명도 아니고 세 명이었다. 작은 꼬마 세 명. 생쥐 분장을 하고 있었다.


“뭐야, 너희들. 지금 내 오렌지 주스 훔치는 거예요? 셋이서 그 작은 이백오십 미리 한 병 마시겠다고?”


범인 중 한 명이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 죄송해요. 거봐, 내가 하지 말쟸잖아.”


“뭐야, 하얀 선생님 맨날 요술 주스 마시는 것 같다고 했잖아.”


“요술 주스?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예요?”


“얘가요, 하얀 선생님이 요술 주스 마셔서 발레 잘하게 됐다고. 그래서 마지팬 리더 역할 추게 된 거라고 그랬어요.”


“내가 언제 그랬어! 하얀 선생님이 발레 잘하신다고, 매일 공연 전에 오렌지 주스 마시는 걸 봤다고 그냥 그랬지!”


“그래서 하얀 선생님의 오렌지 주스 마시면 우리도 발레 잘하게 된다며! 내년에는 꼬마 클라라나 다른 더 예쁜 역할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했잖아!”


도난은 내가 당했는데, 목청이 큰 것은 꼬마 생쥐들이었다.


“싸우지 말고요. 아니 저는 자꾸 오렌지 주스가 사라져서 무슨 일인가 했잖아요.”


꼬마 생쥐 일호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상태로 내게 물었다.


“하얀 선생님, 진짜 요술 주스 마셔서 발레 잘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거 매일 마시는 거예요?”


“일단 눈물부터 그쳐요. 여기 티슈. 그렇게 울면 분장 다 지워져서 나중에 분장 선생님한테 혼날 텐데.”


분장 선생님의 분노를 살 것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생쥐 세 마리가 모두 엄청난 눈물바다를 만들어 버렸다. 이 녀석들, 나는 하나도 안 무서운가 보네.


“자 뚝 하고요. 뚝 하면 제가 발레 잘하게 될 수 있는 비밀 알려드릴게요. 셋 다 그쳐야 비밀 알려줄 거예요.”


비밀을 알려준다고 하니 드디어 세 명이 수도꼭지를 잠갔다.


“뭐예요, 하얀 선생님의 비밀?”


“진짜 알고 싶어요?”


“빨리요 선생님, 비밀 알려주신다면서요.”


“네 네, 알려드릴게요. 이거 요술 주스 맞아요.”


내가 오렌지 주스가 요술 주스라고 하자 금세 아이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거 봐, 내가 이거 마시면 된댔잖아!”


“근데, 꼭 제 거를 마셔야 되는 건 아니고, 아무런 과일 주스를 마셔도 되는데요. 그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뭔데요?”


“원래 요술을 부리기 전엔 주문을 걸어야 되잖아요? 발레를 잘하게 되는 주문이니까 말이 아니라 몸으로 주문을 걸어요. 일단 기지개를 한 번 쭉 피고요, 정말 집중해서 클래스에 참가하는 거예요. 클래스를 정성스럽게 마친 뒤에, 심호흡을 하고 주스를 마시면 돼요. 주스만 마신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꼭 기지개를 피고 집중해서 클래스에 참가해야 해요. 안 그러면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아, 그리고 공연 직전에 마시면 안 되는 거 알죠? 공연 직전에 마시면 공연 중에 화장실 가고 싶을 걸요?”


꼬마 생쥐 세 마리는 아주 집중해서 내 이야기를 듣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사람의 주스를 훔쳐서 마시면 효과가 없어요. 다른 사람들 대기실에 허락 없이 들어오는 것도 요술의 효과가 사라지게 만들어버려요.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이러면 안 돼요, 알겠죠?”


셋은 입을 모아 “네!” 하고 답했다.


“그럼 어서 가보세요. 오늘 공연 잘하고요.”


“하얀 선생님도 공연 잘하세요! 파이팅!”


“파이팅!”


꼬마 생쥐 세 마리는 언제 왔었냐는 듯 쪼르르 대기실 밖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나의 오렌지 주스 도난 사건의 죄인은 찾았으나, 귀여워서 이번 한 번만큼은 그 죗값을 묻지 않기로 했다.


이 녀석들, 정말 요술 제대로 부리려나?







본 단편 소설은 연작 소설 <이십사야> 중 열세 번째 편입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매일 한 편씩 업로드되며, 총 24편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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