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스물한 번째 날
먹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나는 치과 치료를 너무나 싫어해서 단 것만큼은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단 것을 먹는 것을 싫어한다. 단 걸 안 먹는다고 해서 치과 갈 일이 아예 안 생기는 건 아니지만, 치과 치료가 공포스러우니 내가 단 것을 끊음으로써 일생에 치과를 한 번이라도 덜 갈 수 있다면야. 성인이 되고 나서는 자의로 단 것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처음 안젤로를 만났을 때, 무용수 출신이라기에 맨날 샐러드만 먹지 않을까 했는데 오해도 그런 오해가 없었다. 끼니를 먹는 횟수가 삼시 세끼가 아닐 뿐, 안젤로는 나보다도 먹는 것을 사랑했다. 아무래도 안젤로의 말대로 이탈리아의 사람들은 그 무엇보다도 ‘기쁨'을 중요시 여기는 것 같다. 하루에 세 번 초콜릿을 먹지는 않아도, 몸을 많이 움직이는 날이면 오후에 꼭 단 걸 입에 달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나는 평생 입을 대보지 않은 양갱도 무척이나 사랑한다. 나는 팥의 맛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양갱의 질감도 물컹한 것이 보기만 해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데 말이다. 이 땅에서 나고 자라지도 않은 사람이 양갱을 저리도 좋아하는 걸 보면 희한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은 눈도 오고, 안젤로가 오래간만에 저녁에 쉬는 날이라 집에서 스노우볼과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2022년에도 안젤로는 저녁 식사 시간이면 꼭 초를 킨다. 전기가 아닌 진짜 불이 주는 빛과 따뜻함이 특별함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작은 불꽃이라 해도, 불꽃이 앞에 있다 보니 몸가짐도 더 정갈해진다고 해야 할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각자의 취미를 즐기곤 한다. 안젤로는 음악을 듣고, 나는 체스를 두고. 안젤로는 디카페인 에스프레소를 다과와 곁들이고, 나는 라벤더와 로즈마리를 차로 우려 마시고. 내가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안젤로는 항상 물어본다. ‘자기도 이거 먹을래?’라며 달콤한 꼬임을 하는 것이다. 나의 답은 항상 ‘아니, 괜찮아. 물어봐줘서 고마워’였다. 오늘 저녁 전까지는 말이다.
안젤로가 오늘의 과자를 뜯었다. 요 며칠간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며 이탈리아식 파네토네를 먹더니만, 오늘은 파네토네에 질렸는지 개별 포장이 되어있는 갈색 쿠키를 하나 꺼냈다. 나도 어디서 많이 보았던 것 같은데, 큰 관심은 두지 않았다.
“Baby, would you like one? (자기야, 하나 먹을래?)”
“No, it’s ok. Thanks for asking. (아니 괜찮아, 물어봐줘서 고마워)”
하지만 안젤로가 비닐 포장을 뜯자, 내 코가 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치과의 소독약 냄새와 드릴 소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다시 체스판으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안젤로가 첫 입을 물자 다시 코가 쿠키를 향했다.
한국어 의성어는 세계의 그 어느 언어보다도 뛰어나다고 자부하지만, 안젤로가 쿠키를 베어물 때 난 소리는 ‘바삭' 보다는 영어 단어 ‘크런치 (crunchy)'에 가까웠다. 치아가 쿠키를 만나는 ‘크’ 소리, 그리고 쿠키가 바스러지며 나는 ‘뤄언-치’.
그렇게 안젤로가 쿠키를 한 입 먹자 쿠키의 향이 거실에 퍼졌다. 녹진한 캐러멜과 생강 같은 향신료의 따스한 향기.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똑하고 떨어졌다.
안젤로는 내가 갑자기 우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 물었다.
“Is everything ok, baby? What’s going on? (괜찮아, 자기? 무슨 일이야?)”
“Can I please try one, actually? (나 하나만 먹어봐도 돼?)”
“Oh, please, go ahead. (아 당연하지. 여기.)”
안젤로가 건네준 쿠키를 베어 물었다. 혀에 닿자마자 바로 알았다.
이건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께서 즐겨 드시던 쿠키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 나는 할머니 손에 컸다. 할머니는 간혹 믹스 커피에 이 쿠키를 드시곤 했는데, 손주가 탐내지 않아도 항상 쿠키를 양보하시곤 했다. 나는 끼니를 배불리 먹었어도 그 쿠키를 잘도 받아먹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나의 편이셨다. 내가 중학교 시절에 당번을 서다가, 학생들의 배꼽을 꼬집는 괴상한 체벌을 하시는 학주 선생님의 컵을 홧김에 일부러 깨 먹었을 때에도. 사내 새끼가 사생 대회에서 무슨 꽃을 그리고 앉아있냐며 시비를 걸던 아이들과 싸우고 집에 왔을 때에도.
‘우리 강아지 속상해서 그랬지. 속상하면 이 할미한테 털어놓고, 그 사람들처럼 낮아지지만 마. 우리 손주는 훌륭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들보다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어' 라며 내 편이 되어 주시곤 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하면 할머니가 무척 기뻐하셨을 텐데. 할머니께서 안젤로를 얼마나 예뻐하셨을까. 제인 오스틴은 여자의 상상력은 너무나 발 빨라서, 첫 만남에서 결혼까지 상상해버린다고 하지만 그건 정말 나 같은 남자의 상상력이 얼마나 빠른지 모르는 소리다. 나는 쿠키 한 입에서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안젤로를 얼마나 예뻐해 주셨을까 하는 생사를 넘나드는 회귀적 상상까지 해버렸으니까.
안젤로는 계속 물었다. 괜찮아 자기?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쿠키가 잘못했네. 우리 자기 울리고. 안젤로는 넓은 어깨와 탄탄한 팔로 나를 안아 줬다.
이거 봐라, 우리 할머니께서 안젤로 얼마나 예뻐하셨을까. 손주가 짝을 만났으니 이제 든든하다 하셨을까.
“What’s the name of this cookie? (이거 쿠키 이름이 뭐야?)”
“Speculoos. The brand’s name is Lotus but it’s called Speculoos. (스페큘로스 쿠키야. 브랜드는 로투스인데 쿠키 종류는 스페큘로스라고 해.)”
“Lotus, right. It was my grandma’s favorite. (로투스, 맞다. 우리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쿠키셨어.)”
“Oh she and I would have had so much in common. I wish I had the honor and pleasure of meeting her. (할머님이랑 나랑 통하는 게 많았을 것 같네. 생전에 직접 뵀으면 좋았을 텐데.)”
응 맞아, 우리 할머니랑 너랑 많이 통했을 거야. 둘 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
할머니 보고 계세요? 전 짝도 만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 제 짝 안젤로도 할머니처럼 로투스 쿠키를 좋아하네요. 믹스 커피 대신 에스프레소에 먹지만요.
달콤한 걸 먹기 싫어하는 나는 내 눈물로 촉촉해져 버린 로투스 쿠키를 마저 다 먹으며 밤을 맞이 했다.
본 단편 소설은 연작 소설 <이십사야> 중 스물한 번째 편입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매일 한 편씩 업로드되며, 총 24편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