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스물두 번째 날
밤이 가장 긴 날, 다시 생명이 살아난다는 날, 동지다.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는 날이라고 한다. 이렇게 온 세상이 꽁꽁 얼어버린 것 같은데 두꺼운 얼음장 밑으로도 삶은 흘러간다. 다가올 크리스마스 파티는 우리가 살아있음을, 더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는 자리이기도 하니까 오늘은 채소로 끼니를 먹기로 했다.
채소만 먹는다는 것이 말만 복잡하지, 쉽게 말하자면 며칠 전에 미가 만들어낸 아이디어는 요상하지만 실상은 또 썩 나쁘지 않은 버번이 들어간 팥죽을 먹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미, 미, 승아, 재원이 퇴근 후 가방 다방에 모여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이렇게 다 같이 넷이서 한꺼번에 모이는 자리는 처음이었다. 분위기 메이커인 재원과 보미 덕에 아무도 낯간지러워하지 않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저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사실 크리스마스 파티를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하니, 거나하게 먹고 빵빵해진 배를 두드린 뒤 퍼질러져 있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후딱 먹고, 열심히 청소하고 장식해야 하는 그런 밤이었다.
그래서 나물 반찬 몇 가지와 백김치와 버번이 들어간 팥죽을 먹었다. 끼니로 먹는 것이니 설탕을 넣지 않아 ‘단’팥죽은 아니었다. 버번의 향과 팥의 향이 그럴듯하게 잘 어울린다는 것이 모두의 평이었다. 오늘따라 단 게 좀 땡겼던 승아만 설탕을 솔솔 뿌려 단팥죽처럼 만들어 먹었다.
이제 배도, 마음도 한결 따뜻해졌겠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야 하는 때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이미 가방 다방에서 장식해뒀으니 녹지 않는 눈이 카페 안에 펑펑 내리게 할 차례다.
일단 가구를 재배치했다. 테이블과 의자들을 필요한 개수에만 맞추어 카페 가장자리에 배치했다. 나머지는 모두 창고행.
한쪽에서는 다방 입구를 장식할 풍선 아치를 만들기 위해 풍선을 열심히 불었고 (헬륨 주입기를 생각하지 않은 죗값으로 모두가 현기증에 시달리게 생겼다) 다른 한쪽에서는 새하얀 종이를 접고, 여러 각도와 곡선으로 잘라내어 종이 눈송이를 만들었다.
풍선을 부는 작업이 꽤나 고된 작업이니 양 팀이 번갈아 가며 했다.
그걸로 준비가 끝이었으면 좋겠지만 전구도 달아야 하고, 솜으로 만든 설원, 그리고 베이킹 소다와 헤어 컨디셔너를 섞어서 만든 인공 눈도 장식해야 한다.
밤이 긴 하루라서 다행이다.
“와, 재원이 폐활량 좋은 거 봐. 나 풍선 한 개 부는 사이에 얘는 막 세 개를 불어. 직업을 잘못 골랐네, 관악기 연주했어야 했던 거 아냐?”
승아가 감탄하며 말했다.
“에이, 폐활량만 좋다고 악기 연주하나요. 악보도 볼 줄 모르는데 무슨 연주를 해요.”
“지금이라도 배우면 되지.”
“그러지 말고 우리 노동요라도 틀던가 부르던가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보미가 제안했고, 그 제안은 투표에 부칠 것도 없이 바로 실천에 옮겨졌다.
“루돌프 사슴 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 만일 내가 봤다면 불붙는다 했겠지"
미미 페어는 역시 죽이 좋아 보미의 제안에 미가 재빠르게 <루돌프 사슴코>를 부르며 신나게 몸을 흔들어댔다.
“언제 적 노래야 이게. 누가 보면 버번 들어간 팥죽 먹은 게 아니라, 팥 들어간 버번 마신 줄 알겠어”라고 놀리던 보미도 금방 큰 목소리로 캐롤 부르기에 동참했고, 승아와 재원도 ‘음치, 박치가 뭐냐, 제일 재밌게 노는 사람이 일류다' 하는 정신으로 열심히 캐롤을 부르기 시작했다.
꽁꽁 얼어붙은 밤을 노래와 율동으로 녹일 수 있을 듯한 열기였다.
<루돌프 사슴코> 노래가 끝나자 재원이 자연스레 <흰 눈 사이로>를 부르기 시작했다.
“종소리 울려라 종소리 울려라 우리 썰매 빨리 달려 종소리 울려라!”
모두가 흥에 겨워 눈썰매를 타는 것인지 아니면 스키를 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몸짓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팥죽 칼로리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라면 팥죽을 두 그릇도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와중, 승아의 역동찬 팔꿈치가 카운터에 올려져 있던 스노우 글로브를 치고야 말았다.
쨍그랑.
스노우 글로브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모두가 순간 동작 정지를 해버렸다. 흥겹게 부르던 캐롤도 중단되었다. 동풍의 한기가 순식간에 가방 다방 안으로 침입해 버렸다.
승아는 다급하게 보미에게 사과했다. “이거 보미 사장님 꺼죠? 어떡해요, 제가 칠칠맞게 주변도 안 보고…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 변상을 해드려야 할지…”
보미는 바닥에 와장창 깨진 스노우 글로브 유리와 흘러 퍼진 액상 글리세린, 인공 눈송이, 그리고 세상 밖으로 나와버린 사슴 부자와 종달새를 내려다보았다. 망원동 골동품 가게에서 발견한 이래로 매일같이 보미의 하루에 반짝임을 선사해준 소중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물건이 제아무리 소중하다 한들, 인연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확인해보니 다행히 사슴 두 마리와 종달새는 멀쩡했다.
“괜찮아요. 저희가 하도 신나게 노래 부르고 춤추다 보니 사슴 두 마리랑 종달새도 우리랑 조인하고 싶어서 유리 돔 밖으로 나왔나 봐요.”
“그래도 아끼시는 물건일 것 같은데, 정말 정말 죄송해요. 제가 어떻게든 보상해 드릴게요. 같은 걸로 대체하지는 못하더라도…”
보미는 속상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아니예요. 진짜 괜찮아요. 우리 다 같이 모였는데, 자기들만 빼놨다고 시샘했었나 봐요. 또 이렇게 나와서 바깥공기를 마시고 있으니 이 동물 친구들도 얼마나 행복해하겠어요?”
보미가 그렇게까지 말해주니 승아는 안심이 되면서도 미안한 마음만은 여전했다. 승아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보미는 “우리 부르던 노래마저 부르죠. 이 친구들이랑도 다 같이” 하며 다시 캐롤을 불렀다. 아는 노래, 모르는 노래, 몇 번은 들어본 노래를 죄다 불렀다.
온기도 활력도 충전한 넷은 음악은 스피커에게 맡겨두고, 다시 가방 다방을 환상의 설원으로 탈바꿈시키기 작전으로 돌아갔다.
밤은 더 깊어져 갔고, 이제 원한다면 어느 밤이던 진짜 눈을 맞을 수 있게 된 사슴 부자와 종달래 아저씨도 인간 넷을 흡족스레 지켜보았다.
본 단편 소설은 연작 소설 <이십사야> 중 스물두 번째 편입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매일 한 편씩 업로드되며, 총 24편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