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스물세 번째 날
우리에겐 티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동지가 지나면 매일같이 낮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한다. 여전히 어둠이 더 길지만 달이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차오르듯, 빛도 점점 더 차오른다. 그래서 오늘은 어제보다 밝은 하루가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조금은 틀린 생각이었다.
가방 다방은 오늘도 바빴다. 승아와 재원이 지난밤에 장식을 많이 도와주긴 했지만 여전히 가게를 정리해야 했고, 파티용 음식과 음료도 마저 준비해야 했으니까. 동시에 배달 주문은 또 계속 받고 있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였다. 거기다 날씨는 또 어쩜 이렇게 눈치 없이 꽝꽝 얼어붙는지. 배달원이 오가며 문이 열고 닫힐 때마다 동풍 장군의 매서움이 느껴졌다. 보통 웃으면서 인사하던 배달원들도 오늘만큼은 속눈썹까지도 얼어붙은 듯했다.
이렇게 추운 날에 하필이면 미는 연말을 맞이하여 패션에 신경을 쓴다며, 롱패딩 대신에 쇼트 패딩을 입고 나왔다. 그러니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와, 진짜 오늘 무릎 연골이 드라이아이스처럼 승화되는 기분이야.”
“그러게 누가 이런 날에 멋 부리래? 근데 이렇게 추우면 드라이아이스도 승화 안 될 것 같지 않냐? 고대로 얼어있을 것 같은데?”
“그러게나 말이야. 우리 오늘 오븐이나 잔뜩 부려먹자. 내일 디저트로 구움 과자만 잔뜩 내놓는 거야. 그래야 우리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게 일할 것 같아 오늘.”
“오늘 따뜻하자고 내일 구움 과자 잔뜩 내놓자고? 뭐… 어차피 디저트 내놓긴 해야 되니까. 말 되네.”
오늘따라 난방은 시원찮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이런 날에는 정말 집에만 콕 박혀 있어야 하는데.
미와 보미가 갓 구운 진저브레드맨 쿠키에 아이싱으로 이목구비를 그려주며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와중, 갑자기 다방의 불이 한 번에 팍, 하고 꺼졌다.
“뭐야.”
“아 헐, 우리 지금 정전된 거야?”
미와 보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기 기구 중 켜져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두꺼비 집 내려간 거 아니야? 미 너 혹시 핸드폰 있으면 핸드폰으로 라이트 좀 켜봐. 나 핸드폰을 어디다 뒀는지 모르겠네.”
미가 핸드폰으로 불빛을 만들어내 다방 내부를 확인해보니 정말 모든 전자 제품들이 다 꺼져있었다. 둘은 두꺼비 집을 확인해 보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잠시 다방 밖으로 나가보니, 건물 입주민들이 다들 서성이며 무엇이 문제인지 확인하려는 분위기였다.
“아가씨들은 괜찮수?”
오며 가며 뒷모습이나 얼굴만 얼핏 본 할머니였다. 이 근방에 사시겠거니, 했는데 같은 빌딩의 주민인지는 몰랐다.
“아 예, 괜찮습니다.”
“갑자기 불이 꺼져가지구. 난방도 그렇고. 집이 컴컴하고 냉랭해서 어디 들어가 쓰겄어?”
“그러게나 말이예요. 오늘 진짜 너무너무 추운데 빨리 전력이 돌아왔으면 좋겠네요.”
“아니 대한민국에 내가 몇십 년을 살았는데, 2022년에 정전이 될 줄이야 내가 알았겄어? 컴컴허니 집에 들어가기도 싫고.”
사람들은 웅성웅성거릴 뿐, 딱히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바로 해결될 문제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혼란이 계속되던 와중, 보미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사두었던 LED 초가 생각났다.
“할머니 혹시 불빛 필요하시면 저희 다방에 있는 가짜 양초라도 좀 드릴까요? 진짜 양초가 아니고 건전지 들어있는 건데.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낫지 않으시겠어요?”
“그랴도 돼?”
“그럼요. 추운데 일단 저희 다방으로 들어오세요.”
“그럼 신세 좀 질게요.”
다방으로 향하다 보니, 할머니께서 다리 한쪽이 불편하셔서 미와 보미의 부축이 있어야 더 쉽게 이동하실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둘은 좌청룡 우백호처럼 할머니를 에스코트해서 가방 다방으로 모셔갔다.
가방 다방이 반짝이고 따스하면 좋으련만, 깜깜한 냉골이었다. 보미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사두었던 초들을 다 켰다. 상황이 좀 우습긴 하지만 나름 낭만적이어 보였다. 파티를 위해 산 것이 이렇게 응급한 상황에도 쓰이다니. 예상치 못한 용도였지만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를 미리 시작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다방이 언제나 예쁘더만, 오늘은 특히나 예쁘네?”
“아, 내일 뭐 행사가 있어서 장식해둔 거예요. 할머니 너무 추운데 차라도 좀 드실래요?”
보미가 초를 모으는 사이, 미가 할머니께 여쭤봤다.
“에그, 아가씨들 귀찮아서 안 디야.”
“안 귀찮아요. 저희도 추워서 마시려고 했어요. 달달한 생강차 맛보시겠어요?”
“고마워서 어쩌나.”
“별말씀을요.”
그나마 가스버너가 하나라도 있길 망정이지, 요새 유행하는 인덕션만 있었다면 차 한 잔도 대접하지 못할 뻔했다. 셋은 생강차를 손에 쥐고 금세 얼어붙은 손을 생강차에 녹였다.
“내가 이 건물 살면서도, 이 다방은 너무 멋져 보여서 나 같은 사람은 들어오면 안 되는 줄 알았는디. 오늘 이렇게 다 들어와보네, 아가씨들 덕분에.”
할머님의 복숭아빛 미소에 보미는 반해버렸다.
“어머 할머님, 무슨 말씀이세요. 언제든지 오세요. 완전 환영합니다.”
“아가씨가 주인이어?”
“네, 그러니까 언제든 차 드시고 싶으시면 여기로 오세요."
보미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에그, 사장님을 아가씨라고 계속 불렀네. 망측하게. 미안혀.”
“괜찮아요, 할머님. 저희 다방 차 맛있죠? 건물 주민 특별 서비스 해드릴 테니까 언제든지 편하게 오세요.”
“아이고 이렇게나 마음씨까지 예쁘구먼. 고마워이.”
“우리 사장님이랑 친구분 이름은 어찌 되시나?”
“저는 장미라고 하고요. 외자 이름이예요. 성이 장이고 이름이 미예요. 그리고 저희 사장님은 윤보미입니다. 할머님 존함은 어떻게 되세요?”
“난 김영자라고 해. 만나서 반갑소.”
할머니께서는 보미와 미의 손을 꼭 잡으셨다.
그렇게 셋이 오손도손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사이, 다시 가방 다방에 불이 들어왔다.
“지화자! 다시 전기가 들어온 모양이여.”
“어머 그런 모양이네요.”
“나는 이제 집에 가볼랑가 해. 차도 얻어 마시고, 초까지 빌려준다고 하고. 근데 초는 이제 필요는 없겠어.”
“할머니 저희가 댁 앞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미가 단호하게 할머니께 말씀드리자 할머니도 거부하지 않으셨다. 할머니의 댁을 일부러 들여다보려 한 것은 아니지만, 얼핏 보건대 할머니는 혼자 사시는 것 같아 보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일 할머니도 파티에 초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눈빛만 보고도 알았다.
보미가 말문을 열었다.
“할머니, 내일 성탄절 전야잖아요. 저희 친구들이랑 작게 모여서 파티하는데, 할머니 혹시 내일 밤에 적적하시면 오셔요. 저희랑 맛있는 것도 먹고, 음악도 듣고, 춤도 추고 그래요.”
“에이 나같이 나이 많은 사람이 그런 자리 가면 되나. 젊은 사람들끼리 놀아.”
“에이 무슨 섭섭한 말씀을 하셔요. 저희 부모님도 오시고, 그리고 저 마음만은 오백살이예요, 오백살.”
“마음만은 사장님이 나보다 언니가 이거지?”
“말도 마세요, 할머니. 보미가 겉보기에만 어려 보이지 속은 다르다니까요? 할머님 심심하시면 언제든 오셔요” 라며 미도 한 수 거들었다.
“할머님 자리에 존함 석자 딱 적어둘 거니까 꼭 오세요.”
“에그 예뻐라. 알았어요. 고맙소 두 분. 내일 봅시다.”
할머니께서는 두 사람의 손을 또 꼭 붙잡으셨다.
누군가는 그랬다, 선의가 있어도 여유가 없으면 친절을 베풀 수 없다고. 절대 틀린 말이 아니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정전 덕에 보미와 미는 여유를 만들고 다정함을 행할 수 있었다. 때로는 어둠이 빛을 만들기도 하는 모양이다.
본 단편 소설은 연작 소설 <이십사야> 중 스물세 번째 편입니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매일 한 편씩 업로드되며, 총 24편으로 구성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