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사야 (二十四夜) 중 스물네 번째 밤
크리스마스 이브 전야부터 고순호 씨의 남편 윤상준 씨는 부인에게 단단히 일뤄뒀습니다. 올해엔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부터 정신 말똥말똥하게 있다가 자정을,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야 한다고요. 아니 언제부터 이렇게 크리스마스를 챙겼다고, 뭐 얼마나 대단한 것을 하려고 하기에 그러나 했는데 크리스마스 이브 해 질 녘이 다가오자 옷부터 갈아입으라고 하네요. 어디서 가져왔는지 눈송이 패턴이 곱게 수놓아진 스웨터와 은빛 얼음 빛깔의 새틴 플레어스커트, 쓸모보다는 아름다움이 무기인 새하얀 코트를 준비해 놨더군요.
"안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아리따운 우리 마누라, 오늘따라 더 예쁘네."
"안 하던 걸 다 하고. 오늘 왜 그래요?"
"자, 자 우리 이제 곧 나가야 되니 이거부터 해요."
윤상준 씨는 고순호 씨의 눈을 안대로 가렸습니다.
“뭐야 우리 뭐 하려는 건데요?”
윤상준 씨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나만 믿고 따라오소” 하고 답하고는 고순호 씨를 아주 천천히 그리고 세심하게 어디론가 데려갔어요. 발 한 발짝 한 발짝을 뗄 때마다 안대를 하고 있으니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으나, 믿고 따라오라니 따라갔지요.
걸어서 그리고 차를 타고 갔어요. 곧 목적지에 도달하자 윤상준 씨가 안대를 벗겼고, 고순호 씨 앞에는 보미와 미, 그리고 친구들이 나타나 “서프라이즈!’라고 외치며 반겨주었습니다. 그들 사이로 산타 모자를 쓰고 있는 새하얀 고양이도 ‘야옹’하며 고순호 씨에게 인사했어요.
이곳은 마법이라도 걸린 듯한 가방 다방이었어요. 가방 다방의 시그니처인 녹색 벨벳 커튼과 초콜릿색의 호두나무 가구들을 하얀 설원이 뒤덮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눈송이와 얼음 결정이 보였지요. 차가운 밤이지만 마음만은 따뜻해지는 광경이었죠.
보미의 오랜 친구인 미는 제일 먼저 고순호 씨를 싱크대로 안내했습니다. 분홍빛 장미꽃잎이 동동 떠있는 장미꽃차가 싱크대 가득 담겨 있었어요. 미는 호롱박으로 차를 한 바가지 떠내더니 말했지요.
“어머님 너무 오랜만이예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자 이제 우선 2023년을 맞이하기 전에 2022년에 두고 가고 싶은 것을 떠올려주세요. 그러면서 손도, 두고 가고 싶은 것도 모두 씻어내 봐요.”
고순호 씨는 2022년에 두고 가고 싶은 것도, 2023년에 고스란히 가져가고 싶은 것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답을 생각하며 손을 씻을 수 있었죠. 깨끗해진 손처럼 2023년도 말갛게 맞이할 수 있길 바라면서요.
미와 손을 씻어내는 의식을 마치고 나자, 딸 보미가 음료를 한 잔 건넸습니다. 크랜베리 주스와 샴페인을 섞은 칵테일이었지요. 크리스마스 리스가 떠오르는 녹색 로즈메리 그리고 붉디붉은 크랜베리가 동동 띄워져 있었습니다. 정성이 듬뿍 담긴 환영주였어요.
“우리 딸, 언제 이런 거 만드는 것까지 배웠대? 커피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칵테일도 만드는 거야?”
“서빙만 제가 하고, 만들기는 저기 오늘 파티 아이디어 내준 이재원 씨께서 만든 거예요.”
“어머님, 드디어 인사드리네요, 반갑습니다. 이재원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아버님께서 고쳐주신 구두 신고 왔어요. 아버님 덕에 항상 어느 자리를 가나 빛날 수 있었는데, 그런 귀한 분의 사모님을 이렇게 또 뵙게 되니 너무 행복하네요.”
“어쩜 마음씨도 말도 이리 고우신지. 고마워요.”
이재원 씨와 보미는 친구들 모두에게 칵테일을 나눠주고 고순호 씨에게 모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소개해줬어요.
이 분은 미의 친구이자 발레리나 방하얀 씨,
이 분은 하얀 씨의 발레 마스터 안젤로 선생님,
이 분은 안젤로 선생님의 남자친구 최성준 씨,
이 분은 최성준 씨의 직장 동료 박승아 씨,
이 분은 박승아 씨의 남자친구이시자 아빠 구둣방 단골손님 이재원 씨,
이 분은 우리 건물 이웃 김영자 할머니,
아, 그리고 이 오늘 산타 역할을 맡은 이 보송보송한 친구는 안젤로 선생님네 고양이 스노우볼.
이 파티 우리 모두가 다 같이 준비한 거예요.
“와 이렇게 다들 연결되어 있구나. 정말 큰 듯하면서도 촘촘한 세상이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해 주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라고 고순호 씨가 말했어요.
모두가 서로 인사하고 반가워하는 사이, 스피커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고 이젠 방하얀 씨와 안젤로 선생님의 차례였어요. 둘은 가방 다방에 모인 모두에게 왈츠를 추는 방법을 알려주었지요.
“왈츠는 정말 누구나 출 수 있는 춤이예요. 박스 스텝이랑 쿵 짝짝 쿵 짝짝 박자만 기억하시면 돼요. 양발로 네모를 그리시는 거예요. 리더는 이렇게 오른발을 먼저 앞으로, 팔로워는 왼발을 먼저 뒤로 가시고요. 한 발이 갔으면 다른 발도 따라가야겠죠? 그 대신 다른 발을 바로 옆에 붙이지 말고 어깨너비로 짚고, 두 번째 짚은 발을 향해 첫발이 따라가요. 리더들은 오왼오 왼오왼 순서로 쿵 짝짝 쿵 짝짝 리듬 맞추시고, 팔로워들은 왼오왼 오왼오로 쿵 짝짝 쿵 짝짝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듣는 거보다 직접 해보시면 더 쉬워요!”
방하얀 씨와 시범을 보여주던 안젤로 선생님은 고순호 씨에게 다가가 “마담, 저와 춤춰주시겠습니까?” 하더니 고순호 씨에게 직접 박스 스텝 추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몇 번 시도해보더니 고순호 씨는 금세 윤상준 씨와 박스 스텝을 출 수 있게 되었지요.
계속 발로 작은 정사각형 하나를 그리고 있을 뿐인데,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지요.
스피커에서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크리스마스 왈츠>가 흘러나오고, “에그 늙어서 이런 건 이제 못해"라고 하시던 김영자 할머니도 최성준 씨의 정중한 요청에 소녀같이 배시시 웃다가 같이 왈츠를 췄어요.
가방 다방은 음악과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밝게 빛났지요.
얼마나 춤을 췄을까, 모두들 배가 고파지자 저녁 식사를 했지요. 시장이 반찬이라고, 왈츠를 춰서 그랬기도 했겠지만 미와 보미가 정성스레 준비한 저녁은 꿀맛이었어요. 최성준 씨가 가져온 안젤로 선생님의 고향에서 재배했다는 와인도 식사에 곁들였고요.
그렇게 모두가 황홀함에 젖어있는데, 보미가 식사의 화룡정점을 찍을 초콜릿 케이크를 꺼내왔습니다. 통나무처럼 생긴 ‘부쉬 드 노엘'이라는 프랑스식 초콜릿 케이크였지요. 보미가 케이크와 함께 초를 하나 내왔습니다.
“우리 이제 소원을 빌어봐요. 2023년에 우리에게, 이 세상에게 바라는 것을 이 초를 들고 돌아가면서 한 명씩 말해봐요. 저부터 할게요, 저는 2023년에 우리 모두가 더 건강하기를, 서로에게 더 다정해질 수 있기를 빕니다.”
파티에 참석한 이들은 돌아가며
새해엔 더 건강하기, 팬더믹 종결
온누리에 평화
사랑과 우정
로또 1등 당첨돼서 내년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파티 쏠 수 있길!
모두가 매 끼니마다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길
세상에 연어 간식이 가득해지길, 안젤로와 ‘자기'랑 내년에도 올해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길
아까 춘 왈츠 스텝처럼 우아하게 살 수 있길
빌었어요.
보미는 모두의 소원이 듬뿍 담긴 초를 부쉬 드 노엘 케이크 위에 꽂고 불을 붙였습니다. 초를 부는 것은 고순호 씨의 몫이었죠.
불은 단번에 꺼졌습니다.
왠지 모두의 소원이 이뤄질 것이라고, 세상이 새끼손가락을 단단히 걸고 약조해주는 것 같았어요.
여럿이 함께해서 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이 저물고 자정이 다가왔습니다. 밤이 익어갈수록 가방 다방에 머무는 이들의 보조개도 깊어졌지요. 파티의 주인공 고순호 씨도. 그를 사랑스레 바라보는 윤상준 씨도. 두 사람을 위해 정성을 다해 오늘 파티를 준비한 사람들도. 지난밤에야 친구가 된 김영자 할머니도. 세상 밖으로 나온 스노우 글로브의 사슴 부자와 종달새 아저씨까지.
모두가 이토록 기쁜 밤은 오랜만이었어요.
오래도록 추억할 밤이 쓰이고 있었습니다.
본편 수록곡
마중 인사의 말
오늘은 드디어 크리스마스 이브네요. 한국은 추위가 꽤나 매서운 한 주였다고 들었습니다.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지요?
제가 머무르고 있는 프랑스는 한국의 가을 같은 날씨예요. 창 밖의 칠엽수 나무에는 아직도 잎사귀가 조금이나마 버티고 있어요. 이번 주는 유독 해도 잘 안 보이고, 비도 많이 내렸습니다. 프랑스에서 처음 겨울을 맞이하는 지라, 이런 겨울이 생경해서 체감 온도 영하 이십 도를 육박한다 해도 한국의 겨울이 그립기도 했어요. 해가 보이니까요.
프랑스 수도권에서는 가을 겨울에 계절성 우울증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여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도, 기온이 크게 낮지 않을 테니 뭐가 두려운가 했어요. 그런데 정말 가을이 오고 청량함이랑은 거리가 먼 축축하고 회색빛 나날이 계속되니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매일 새 하루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하다가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위한 어드벤트 캘린더 (advent calendar)를 떠올렸어요. 어드벤트 캘린더는 12월 1일부터 24일까지 매일 초콜릿을 하나씩 꺼내 먹을 수 있는 달력이예요. 매일 초콜릿을 하나씩 먹을 수 있다면 12월이 얼마나 달콤하겠어요?
초콜릿을 무척 사랑하지만 사실 매일 먹는 건 치아 건강에 좋은 아이디어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치아 건강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을, 그 대신 초콜릿처럼 달달한 글을 매일 써서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원래는 12월이 다가오기 전에 미리 써두었다가 매일 하나씩 업로드하려고 했는데, 저의 어쩌지 못할 천성으로 인해 12월 1일부터 매일 한 편씩 글을 쥐어짜 냈습니다.
포근한 글만 쓰니 행복한 날도 있었고, 어떤 날은 아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샤워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 아래 서서 멍하니 서있는 날도 있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읽으실 때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쓰는 사람으로서는 고단하면서도 행복했습니다. 여러분께는 행복만 전해졌길 바라요.
저는 불을 조금 무서워하는 터라 진짜 초를 켜지는 않겠지만, 이 글이 초라고 생각하고 소원을 빌어봅니다. 2023년에는 우리가 증오와 편견보다는 사랑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게 되길 빕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소원을 비셨나요? 비신 소원이 꼭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행복한 연말연시 보내세요. Happy holid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