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야마구치 슈의 책『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에서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를 다시 마주했다. 너무 익숙한 문장이었기에 별 감흥 없이 읽게 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 시대적 배경을 함께 생각하며 읽으니 익숙한 명제가 인상깊게 다가왔다.
책에서는 철학사의 흐름 속에서 5세기부터 13세기까지 약 800년간의 공백기를 이야기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위대한 저작들은 이 시기 유럽에서 거의 소실되어버렸다. 당시 사람들은 진리를 찾는 일을 인간이 아닌 ‘신’의 몫으로 여겼고, 진리는 오직 성직자만이 해석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다 13세기, 잃어버린 고대 철학이 이슬람 세계를 통해 역수입되며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기독교 내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서로 다른 진리를 주장하며 충돌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진리는 하나여야 한다’고 배웠는데, 두 개의 진리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상한 상황이 펼쳐졌다. 각자의 진리를 내세운 싸움이 벌어지고, 이 혼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이건 어느 쪽이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틀 자체가 문제다.”
그런 시대에 티핑 포인트가 된 것이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이럴 때일수록, 전부 없었던 일로 하고, 확실한 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생각이었다.
지금 우리는 종교적 진리에 의존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과학’과 ‘정보’를 따른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걸까?
언론, SNS, 유튜브, 각종 커뮤니티. 우리는 넘쳐나는 ‘사실’을 보며 판단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정보는 누군가가 해석해놓은 의견이다. 정치 뉴스는 전문가의 해설을 따라 읽고, 국제 정세는 인플루언서의 관점을 통해 이해하며, 과학적 사실조차 쉽게 재해석한 콘텐츠로 전달받는다. 이 모든 건 누군가의 해석을 팩트처럼 받아들이게 만드는 프레임일 수 있다.
데카르트는 ‘신이 준 진리’에 의심을 품었고, 그 의심을 통해 ‘나’라는 존재의 출발점을 찾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어쩌면 그런 ‘의심’ 아닐까.
이 정보는 누가 만들었는가?
나는 왜 이 말을 믿게 되었는가?
이 관점은 어떤 이해관계 속에 있는가?
비판적인 사고는 세상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그저 믿고 따르는 삶이 아니라, 질문하고 생각하는 태도야말로 우리가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