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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와라] 에노우라 측후소

원시의 자연

by Art Around

에노우라 측후소는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 예술가 스기모토 히로시의 작품입니다. '측후소'라고 하면 매일의 날씨를 관찰하고 예보하는 곳을 뜻하는데, 도쿄에서 약 한 시간 떨어진 오다와라시의 벼랑 끝에 있는 이 측후소 전체가 바로 스기모토 히로시의 작품입니다.


2014년 리움에서 열렸던 개인전 '사유하는 사진'때문에 아마 스기모토 히로시를 사진작가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지 모르겠으나 사실 스기모토 히로시는 전방위적인 매체를 다루는 그야말로 현대 미술가입니다. 그가 주로 다루는 것은 시간과 자연, 그리고 아마도 자연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시간을 초월한 원초적인 무언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시간의 흙을 몇 천 년 전의 사람도 밟았을 테고, 내가 이 자리에 서서 바라보는 저 해의 일출을 몇 만 년 전에도 누군가가 이 자리에 서서 보고 신비롭게 여겼을 테고,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 시간을 중심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인간이 그 안에 존재하는 자연은 셀 수도 없는 세월 동안 무한한 경험을 하고 있었겠죠. 이런 맥락에서 스기모토 히로시는 원, 세모, 네모와 같은 기본적인 도형에 대한 관심도 갖고 있으며 돌과 유리 같은 샤머니즘적인 상징을 가진 재료들에 매료되었기도 합니다. 이를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차용한 것이 스기모토 히로시의 작품들이죠. 스기모토 히로시의 작품을 잘 볼 수 있는 또 다른 곳은 예술의 섬 나오시마입니다. 그곳에서 스기모토 히로시는 자신의 사진 작품을 바다를 향한 절벽 위에 설치하기도 하고, 원시의 인간들이 손으로 파고 들어간 듯한 좁고 구불구불한 통로를 지나면 바다를 볼 수 있는 신사를 만들기도 하고, 물 위에 떠 있는 유리 다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스기모토 히로시에게 있어서 하나의 물체가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에서 벗어나 그 작품이 설치된 주변과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 설치 작품적인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나오시마 프로젝트였다면, 이 에노우라 측후소는 좀 더 작가의 완성형에 가까운 프로젝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도쿄 출신인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혼자 힘으로 도달할 수 있었던 가장 원시적인 숲과 바다가 있는 곳 오다와라. 스기모토 히로시는 '오다와라 문화 재단 Odawara Art Foundation'이라고 하는 문화 재단을 직접 설립하고 그 기관을 통해 에노우라 측후소를 기획하고, 만들어 운영하게 됩니다.


짓다 보니 결국 이것은 건축이 아니라, 좀 더 'art'에 가까운 형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에노우라 측후소에는 크게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도쿄에서 약 한 시간 거리, 하코네 산 바로 아래에 위치한 바다와 바로 마주하고 있는 이 가파른 땅에 스기모토 히로시는 작은 일본식 정원이 보이는 리셉션과, 100m 길이의 회랑형 갤러리와, 바다를 향한 유리 무대, 들어갈 수는 없고 밖에서 바라볼 수만 있는 일본식 다실, 오래된 화석들이 전시된 역시 오래된 집과 조그만 신사 등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시설들은 시원하게 펼쳐진 태평양 바다와, 그만큼 시원하게 하늘로 뻗어 바닷바람을 맞으며 부러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부딪히며 딱, 딱, 소리를 내는 대나무 숲, 그리고 감귤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죠. 스기모토 히로시도 이 감귤 나무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며 에노우라 측후소를 지었다고 하니 어느 계절에 방문해도 좋겠지만 역시 대나무가 푸르고 감귤이 통통하게 익은 겨울에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큰 바다를 접한 에노우라 측후소는 겨울에도 날씨가 맑고, 바람은 세지만 햇살 역시 쨍쨍합니다. 쨍한 겨울 공기와 햇살 속에서 자연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바다는 그 어느 때보다 멀리 뻗어나가 보입니다.


예술은 무엇일까요? 회화가 3차원의 현실을 2차원의 평면 속에 현실보다 더 현실에 가깝게 표현하는 것 이상을 추구하게 된 이후로 예술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복잡하고 정의하기 어려워지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 에노우라 측후소에 서 보면, 적어도 몇 천 년 전에 어떤 인류가 여기에 서서 이 흙을 밟고, 저 먼바다를 바라보고, 그 멀리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지금의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가졌을 것 같다는 것과, 그 느낌을 우리가 글을 보고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와서 실제로 느꼈을 때 그 경험을 아무도 진부하다고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여기에 와 본 누구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https://maps.app.goo.gl/vgjLTiU5YuRMyPcn8?g_st=com.google.maps.preview.copy


좁고 나무가 우거진 에노우라 측후소 리셉션으로 가는 길
길 초입에 있는 Stone Cafe
100m 길이의 회랑 갤러리. 벽에는 스기모토 히로시의 사진 작품이 걸려있고 회랑 끝에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습니다.
마치 구석기 시대에 만들어진 것 같은 돌로 된 문과 복도를 지나가면 바다를 향해 펼쳐진 유리 무대
노끈으로 묶은 돌은 예전부터 오다와라 지역에서 쓰이던 약속으로 '이 이상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밖에서만 볼 수 있는 일본식 다실
스기모토 히로시 특유의 유리와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를 이용한 조형물
화석을 모아놓은 오래된 집
대나무 숲과 감귤나무 숲을 지나면 나오는 조그마한 사당(?)
리셉션 옆에 있는 자그마한 정원 나무 밑에는 로산진이 가지고 있었다는 붉은색 토기로 된 우물 테두리가 있습니다
무엇을 넣어뒀을까 궁금해서 가까이 가서 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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