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의 미술관
곁에 있을 때는 소중한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흔히들 항상 곁에 있으면서 챙겨주는 익숙한 사람의 존재를 이야기할 때 쓰는 말이지만, 이 표현이 비단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저는 네덜란드를 여행할 때마다 떠올립니다.
네덜란드는 땅이 적고 흐린 날이 많은 기후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남부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비교하여 보면 기온도 많이 낮은 편이죠. 그래서 예로부터 네덜란드 지역의 화가들은 이탈리아 화가들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자연의 풍경과 화병의 화려한 꽃, 식탁 위의 고기와 생선, 과일 등의 풍성한 먹거리들을 그렸습니다. 물론 그 소재들에 다른 의미가 부여되긴 했지만, 일반적으로 화창한 날씨와 계절마다 바뀌며 피는 꽃, 먹을거리를 가진 남유럽의 화가들이 그러한 소재를 활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일은 적었죠.
현대의 건축을 보면 네덜란드는 풍성한 자연을 조금이라도 더 일상생활 속으로 끌고 들어오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크뢸러 뮐러 미술관처럼 숲 속에 위치하고 있다거나, 전시실에서도 자연광을 주로 쓴다던가, 아니면 지하층까지 자연광이 들어오는 설계를 통해 조금이라도 더 햇빛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네덜란드 건축의 특징입니다.
많은 미술관을 다녔지만, 이 미술관을 너무너무 좋아한다! 혹은 이 미술관에 꼭 다시 오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곳은 그렇게 많지 않은 편입니다. 그런 미술관 중 두 곳이 네덜란드에 있고, 크뢸러 뮐러 미술관이 그중 한 곳입니다. 네덜란드의 숲은 소박하고, 자연스럽고, 섬세합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스위스의 숲과는 다른 느낌이에요. 크뢸러 뮐러 미술관은 그런 네덜란드의 숲 속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은 암스테르담에서 차로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오테를로(Otterlo) 마을 근처의 호헤 벨루헤(De Hoge Veluwe) 국립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미술관과 이 국립공원 부지는 모두 크뢸러 뮐러 부부의 소유였으며 미술관의 소장품 역시 헬렌 크뢸러 뮐러 여사의 컬렉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헬렌 뮐러의 아버지는 독일인 기업가로 철강을 유통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독일 에센(Essen) 근처에서 시작한 이 회사는 곧 안트베르펜(Antwerpen), 리에쥬(Liège), 런던(London), 뉴욕(New York), 로테르담(Rotterdam) 등에 여러 지점을 낼 정도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네덜란드인 청년 안톤 크뢸러는 1883년 로테르담 지점에 입사해 일을 배우다 1888년 헬렌과 결혼하게 되었고, 1889년 헬렌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게 되자 전체 회사를 물려받아 로테르담에서 운영하게 됩니다. 이후 안톤 크뢸러는 장인의 회사를 물려받아 잘 유지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탁월한 사업 감각으로 선박업과 광산업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대부호가 됩니다.
이들 부부가 그림을 수집하게 된 데는 딸의 가정교사였던 브레머의 영향이 큽니다. 헬렌은 부유한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예술을 접하고 향유할 기회를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어린 헬렌은 스피노자의 철학에 깊이 감명받았는데 이것이 훗날 반 고흐의 작품을 수집하고 크뢸러 뮐러 미술관을 세우겠다는 결심을 하는데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브레머(H. P. Bremmer)는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였으며 이들 부부 딸의 가정교사로 고용되었으나 헬렌에게 그림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브레머의 권유로 헬렌은 그림을 수집하게 되었고 특히, 당시 사망한 지 15년이 흘렀지만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반 고흐의 작품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고흐의 동생인 테오의 부인 요한나 봉허가 둘 사이의 편지를 번역, 출간하여 고흐가 세상에 알려지고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은 그 뒤의 일입니다.
헬렌과 안톤 부부가 고흐의 작품을 수집한 데는 고흐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알아본 브레머의 조언이 있었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헬렌이 스피노자의 철학에 깊이 감응했던 것 역시 큰 영향을 줬습니다.
고흐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원래는 신학자, 그리고 신학자가 되는 것에 실패한 이후에는 전도사가 되고자 했으나 그것에도 실패하고 맙니다. 깊은 신앙심을 가졌던 고흐는 그림으로써 하느님에게 봉사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 깊은 신앙심이 고흐의 믿을 수 없을 만큼 성실한 작업 활동의 원동력이기도 했습니다.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인 자연과 자유에 심취하여 영적인 삶을 추구하던 헬렌은 고흐처럼 인간과 자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고 자연 속에 미술관을 짓고자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휩쓸고 간 상흔만 남은 유럽에는 곧 세계대공황의 여파가 불어닥쳤고 안톤 크뢸러의 사업은 파산하게 됩니다. 이때 헬렌은 컬렉션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는 대신 정부와 협상을 하게 되는데, 바로 자신의 컬렉션과 남편 안톤이 소유하고 있던 사냥터 부지를 국가에 기부할 테니 미술관을 짓고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미술관의 관장으로 임명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협상이 받아들여 지어지게 된 것이 현재의 크뢸러 뮐러 미술관(Kröller-Müller Museum)입니다. 안톤의 사냥터는 현재의 호헤 벨루헤(De Hoge Veluwe) 국립공원으로,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이며 공원 안에는 부부가 사용하던 별장이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