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렉터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컬렉션
헬렌의 뜻대로 미술관은 자연 속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호헤 벨루헤 국립공원의 입구에서 티켓을 구매하면 무료로 자전거를 빌려 미술관까지 갈 수도 있고 국립공원 안을 탐험 할 수도 있습니다. 숲 속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보이는 붉은 벽돌 건물이 크뢸러 뮐러 미술관입니다.
미술관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구관과 이후 증축된 신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관은 현대라기보다는 근대식에 가까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긴 복도를 따라 양쪽으로 작은 방들이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크뢸러 뮐러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컬렉션의 작품들이 방마다 주로 시대별로 구분되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컬렉션을 보면 브레머와 크뢸러 뮐러 부부가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취향의 작품을 구매하기보다는 시대를 관통하는 혜안을 가지고 작품을 컬렉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관은 좀 더 많은 유리창과 자연광을 이용한 전시실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에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 철학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획전 위주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신관의 복도 한 편에 설치된 로니 혼(Roni Horn)의 작품입니다. 아일랜드의 땅은 지구상에서 가장 젊은 땅이라고 합니다. 이미 많은 변화를 겪고 안정된 다른 땅들과는 달리, 마치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처럼 큰 변화를 매일 겪고 있고 그런 변화들이 활화산이나 독특한 토양으로 표현됩니다. 아일랜드 출신 작가인 로니 혼은 이러한 아일랜드의 자연과 기후에 관한 작품을 주로 하는데, 위의 두 작품은 아일랜드의 흙과 빙하를 상징합니다.
다른 시기에 방문했을 때 같은 장소에 전시되어 있던 작가의 작품입니다. 샬롯 포세넨스케(Charlotte Posenenske)라고 하는 독일 출신 작가로, 1960년 미니멀리즘과 새로운 개념미술을 병합하여 혁신적인 작업을 했습니다. 2차원적인 강철판으로 구부러지거나 접힌 3차원적인 조각 시리즈가 그녀의 대표적인 작업 중 하나입니다.
아마 구관과 신관이 이어지는 위치쯤에 미술관의 조각 컬렉션을 전시해 놓은 전시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현실주의 조각의 거장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과 이탈리아 토스카나 출신으로 에트루리안 미술에서 영감을 받은 독자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던 마리노 마리니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의 훌륭한 소장품 중에서도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반 고흐의 작품들이죠. 앞에 글에서 설명했듯 브레머와 헬렌은 일찍부터 고흐의 뛰어남을 알아보고 컬렉션 하기 시작했고 반 고흐 미술관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고흐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고흐는 오늘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이고 특히 그의 후기 작품들-파리 시절 이후의 작품들-이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의 고흐 컬렉션의 특징을 꼽자면 고흐의 기량이 절정에 달했던 후기 시절 작품들 이외에도 초기 작품들부터 시작하여 고흐의 화가로서의 발전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전 시기의 작품들을 골고루 소장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 작품의 제목은 "야생화와 장미가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meadow flowers and roses)"로 제가 방문했던 당시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작품이 가진 특이한 이력 때문이었는데요, 이 작품은 원래 1974년에 미술관에서 매입하였던 작품입니다. 하지만 고흐의 작품치고는 이례적으로 큰 사이즈와 두드러지게 표현된 꽃, 고흐 작품의 발달 과정의 어느 스타일에도 맞지 않는 스타일 때문에 매입 당시부터 진품이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고 결국 2003년에 위작 판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 지속적인 재감정이 이루어졌고 2012년에 다시 고흐의 작품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엑스레이 감정 결과 고흐가 앤트워프의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 그렸던 것으로 기록이 남아있는 두 명의 레슬링 하는 사람의 그림이 꽃 형태 아래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죠. 고흐는 주기적으로 캔버스를 재활용하곤 했습니다. 이미 그렸던 그림 위에 다른 그림을 그리는 식으로 말이죠. 또한 그동안 발전된 새로운 연구 방법을 통해서 이 그림에 사용된 물감이 고흐가 사용하던 것들과 같은 것으로 판명된 사실 역시 이 그림이 고흐의 진품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 전시는 이것을 축하하기 위한 전시로 이 작품과 함께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흐의 희귀한 작품들을 전시했고 굉장히 많은 방문객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는 아마 고흐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작품은 고흐의 네덜란드 시절 작품들 중 가장 야심 찬 작품입니다. 목회자가 되는데 실패한 고흐는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님의 집에 기거하며 그림을 그립니다. 매일매일 땅을 경작하며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건한 모습을 표현하는 것 역시 신에게 봉사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흐는 고향 브라반트에서 동네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100개 이상 스케치하였고 본인이 어느 정도 숙련도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을 때 이 그림을 그립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두 점이 존재합니다. 반 고흐 미술관에 있는 작품이 뒤에 그려진 것이고, 크뢸러 뮐러 미술관에 있는 작품이 먼저 그려진 것입니다. 이 두 작품은 거의 동일한 구성과 스타일을 가지지만 크뢸러 뮐러 미술관의 작품이 좀 더 거칠고 스케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완성하고 고흐는 본인이 드디어 훌륭한 화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물을 그리는 데 있어서 말이죠.
크뢸러 뮐러 미술관에는 또한 고흐가 네덜란드 시절에 그렸던 베를 짜는 사람을 주제로 한 작품을 몇 점 가지고 있습니다. 누에넨에서는 많은 농부들이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집에 돌아와 베를 짰습니다. "나는 그들이 밤에 등불에 의지하여 베를 짜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매우 렘브란트적인 모습이었다"라고 고흐는 썼습니다. 그는 작업공간을 밝히는 희미한 불빛의 회화적인 순간을 표현하려고 했고, 또한 그림에 '영혼과 생명'을 부여하여 이 힘든 작업을 표현하고자 했는데,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를 보면 "때때로 베틀에서 나오는 한숨과 탄식이 느껴져야만 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흐에게는 그것이 기계의 정확한 묘사보다도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