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술을 위한 리서치
드라마 미술은 크건 작건 '어떤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프로젝트의 규모(제작비나 시나리오의 성격 등)에 따라, 이 세계를 만드는 일은 간단할 수도, 복잡할 수도 있다. 어떤 드라마를 만들건 작품이 다루는 소재와 공간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유식한 사람이 미술감독을 하는 게 좋을까? 그럴 수 있겠지. 안타깝게도 나는 알지 못하는 세상이 수두룩하기에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공부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그래서 흥미진진하다.
리서치를 하면 시각적인 결과물을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고, 인간적으로도 성숙하게 되는 면이 있다. 나는 드라마를 하면서 의사나 운동선수의 삶을 엿보거나, 돈이 많은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성격이 깔끔한 사람과 산만한 사람의 방은 어떻게 다른지 등을 관찰하곤 한다. 나와 다른 직업, 처지의 사람들을 모두 이해할 순 없지만, 그들에 대해 무언가 알게 된 만큼씩은 좀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클리셰' 범벅의 설정들,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 나오는 드라마가 많다. 때로는 '뻔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어려울 때가 있지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장소라면, 어떻게 다르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한다. 새로운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리서치는 중요하다.
내가 하는 리서치는 체계적이고 학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내가 몰랐던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그 방법들은 다음과 같다.
말 그대로 자료수집이다. 간편하게는 책과 인터넷으로 알고자 하는 정보들을 찾아본다. 시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기에, 인터넷 이미지 리서치를 가장 많이 한다. 리서치의 주제는 내가 알고 싶은 '리얼리티'에 관한 것이거나, 전혀 현실적이지 않으나 '기발한 것' 사이의 스펙트럼을 왔다 갔다 한다. 작품과 상관이 없더라도 다른 작품이나 디자인 영역의 시각적 트렌드를 살펴보기도 한다.
드라마 스탭이기에 용이하게 할 수 있는 리서치들도 있다. 드라마를 진행하며 수많은 야외촬영(로케이션) 장소들을 답사하게 되는데, 실제로 촬영이 진행될 '확정헌팅' 장소 외에도 드라마와 관련된 여러 후보장소들을 답사하게 된다. 바쁜 시기엔 귀찮을 때도 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장소답사를 아주 좋아하는 편이다. 개인이 허가받기 힘든 공간들을 장소협조를 구한 후에 답사하는 것이라, 사진도 많이 찍을 수 있고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게 된다. 인터넷으로 찾은 이미지보다 발품 팔아 직접 찍은 사진이 훨씬 큰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전문가의 자문이 필요한 경우, 연출팀이 자문자료를 공유해주기도 한다. 미술세팅과 연관된 부분을 전문가와 직접 인터뷰한 적도 있는데 이 또한 좋은 경험이었다. 인터뷰를 통해 내가 궁금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었음은 물론, 인터뷰이 자체, 그 사람의 옷차림과 풍기는 분위기, 말하는 방식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어떤 분야이든 프로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대부분의 연출자는 이미 극 중 공간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있다. 그것이 몇 마디 키워드일 수도 있고, 구체적인 레퍼런스 이미지일 수도 있다. 레퍼런스가 있다고 해도, 구체적인 디자인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추가적인 자료를 수집하고 제시한다. 궁극적으로는 연출자가 생각한 방향으로 걸어가면서도, 새롭고 더 좋은 아이디어를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연출자가 어렴풋한 생각은 있지만 확실한 의견을 말하지 않는 경우가 어렵다. '알아서 해달라'는 말은 '알아서 (내 마음에 들게) 해달라'는 말이다. 무언가 시각화된 자료를 들고 가야,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는 경우도 많다. 때문에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초반부터 적절한 질문을 던지면서 연출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들의 생각을 확장시켜야 한다.
연출자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내가 제시한 이미지에 대해 의견을 말해보라고 하거나, 연출자의 이전 작품 혹은 다른 작품에서 좋거나 참고할만하다고 생각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물어본다. 색이든 형태든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알아내야 한다. 일종의 연출자 인터뷰를 통한 리서치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슬럼독 밀리어네어>라는 영화가 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빈민가 출신의 주인공이 ‘누가 백만장자가 될 것인가’라는 인기 퀴즈쇼의 최종 단계까지 올라간다. 퀴즈를 맞힐수록 사람들은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것이라고 의심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주인공이 살아온 모든 순간이 퀴즈쇼의 정답을 맞힐 수 있는 실마리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다소 운명론 같은 이야기이지만... 리서치를 하기 전에 살면서 이미 알고 있는 정보들을 많이 활용하게 된다. 대학 시절 보았던 전시라던지, 좋아했던 화가의 작품, 여행하며 묵었던 숙소 같은 내 삶의 단편적 기억들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그때 그 건물 이름이 뭐였더라' 하면서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과제가 무엇이든, 내가 내놓는 답에는 은근슬쩍 내 삶이 녹아 있다.
그렇기에 평소의 삶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관심 있게 봐두는 것이 좋다. 내가 놀 때 경험했던 것들을 일할 때 써먹기도 하고, 일하면서 배운 것들을 놀 때 써먹기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어디에선가 듣고선, 리서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기억하고 있는 말이 있다. "상상력은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