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에는 생각보다 많은 디테일이 있다
어느 정도 세트 설치가 완료되면, 디테일을 신경 써야 한다. 나는 내가 놓치곤 했던 디테일에 관한 실수, 더 신경 썼으면 좋았을 부분을 떠올리면 항상 '문'이 생각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문'에는 생각보다 많은 디테일이 숨어 있다.
일단은 세트디자인을 하면서 문을 어떤 재질과 디자인으로 할지 결정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아파트 세트라면, 현관문은 방화문으로, 방문은 목문 혹은 ABS도어로, 베란다로 나가는 문은 샷시문으로 결정하는 식이다.
어떤 공간이냐에 따라 쉽고 자연스럽게 문을 결정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를 도입할 수도 있다. 요즘 상업건물을 보면, 예전보다 훨씬 크거나 다양한 재질의 출입문들이 돋보인다. 드라마 세트에도 어떤 형태의 문이든 사용할 수 있고, 드라마에서 중요하고 상징적인 공간의 출입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가구회사의 사무실 세트를 디자인한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사무실의 출입구를 전체 디자인 톤과 어울리는 철제문으로 제작했었다. 안타깝게도, 세트 리허설 후 연출감독의 요청에 따라 원목으로 된 문으로 교체하게 되었다. 처음엔 울며 겨자 먹기로 교체를 했지만, 완성을 하고 보니 원목문이 주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나무로 된 문은 철로 된 문보다 따뜻한 느낌을 주었고, '직접 가구를 디자인하고 만드는 가구 회사'라는 컨셉을 보여주기에 적절했다. 처음부터 생각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드라마에는 클리셰적인 면이 많다. 드라마의 공간은 주인공의 발걸음을 따라 친절하게 소개된다. 주인공은 로비를 걷고, 복도를 지나치며, 마침내 문을 연다. 그래서 때로 '문'은 새로운 공간을 소개하는 첫 얼굴이자 상징이 된다.
일상생활에서 문이 열리는 방향은 동선, 공간의 효율적인 활용을 위해 결정되는데, 이는 드라마 세트에서도 마찬가지다. 대본상 특별하게 요구되는 동선이 없는 경우, 실제 공간을 참고해서 방향을 설정한다. 평소엔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레 문을 여닫고 다니지만, 일상 속 공간들의 문이 조금씩 다르게 열린다는 걸 디자인을 하며 신경 쓰게 되었다.
-대부분의 건물 출입구나 현관문, 비상구는 밖으로 열리게 설계되어 있다. 이는 긴급상황에서 대피 시 사람들이 문을 밀고 나가기 위한 것으로, 건축물의 피난ㆍ방화구조 등의 기준에 관한 규칙에도 '문화ㆍ집회시설, 종교시설, 장례식장 등 건축물 바깥쪽으로의 출구로 쓰이는 문은 안여닫이로 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법으로 명시되어 있다.
-반대로 방문이나 욕실문은 주로 방의 안쪽으로 열리게 한다. 관리의 용이함과 프라이버시를 위한 것인데, 욕실의 경우 문이 안으로 열려야 문에 묻은 습기가 밖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갑자기 누가 밖에서 문을 열더라도 문이 안쪽으로 열리기에 안에 있는 사람이 한눈에 보이지 않으며, 필요시 안에서 문을 닫고 열리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
-복도에 여러 개의 문이 있는 공간들은 대부분 복도를 다니는 사람들과의 충돌을 막기 위해 안으로 열리는 문을 사용한다. 모텔, 호텔 객실의 경우가 그렇다. 학교에 미닫이 문이 많은 것 또한 같은 이유일 것이다.
-복도에 여러 개의 문이 있지만 밖으로 열리는 문의 예로 교도소가 생각난다. 감방문이 안으로 열린다면 교도관이 문을 열어줄 때 감방 안쪽으로 끌려들어 갈 수도 있으며, 죄수들이 문을 닫고 버틸 수도 있을 것이다. 정신병원 병동에서도 문이 밖으로 열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이유로, 세트를 디자인할 때 구금과 관련된 공간은 문이 밖으로 열리도록 했다.
-이 모든 것은 대본 상황, 동선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문을 열자마자 누군가와 부딪혀야 한다거나, 문 뒤에 숨어있어야 한다거나... 대본에 이러한 특수한 부분이 있다면 문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세트가 완공되면, 전체적으로 문이 잘 작동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세트장은 일종의 임시건축물이고 사용하는 자재나 건축환경이 실제 건축인테리어보다 견고하지 못하기에, 이런저런 이유로 잔고장이 발생한다. 페인트가 달라붙어 잘 열리지 않는 문이라던지, 바닥재 때문에 문이 빡빡하게 열린다던지, 자동문의 전원이 고장 난다던지 생각지 못한 여러 변수가 발생하는 곳이 세트장이다. 이런 문제를 미리 확인하지 않고 카메라가 돌 때 알게 되면, 정말 돌아버릴 노릇이다. 한 번은 로케이션에서 급하게 세팅을 한 후 손잡이가 거꾸로 된 걸 확인 못한 채로 촬영을 한 적이 있는데, 당연히 배우는 손잡이 레버를 아래로 내렸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고, 다음 테이크에서 손잡이를 위로 열며 문을 나가야 했다. 정말 민망한 순간이었다.
-'소리'도 신경 쓰자. 드라마에는 문을 여닫는 씬이 많고, 화가 난 등장인물은 문을 쾅 닫고 나가기도 한다. 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거나, 철제문의 경우 적절한 부속이 없으면 생각보다 너무 큰 소음이 발생한다. 나는 최근에 철제파티션으로 된 문을 여럿 제작하고 나서 이 소리들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나와 제작업체가 꼼꼼히 살피지 않은 탓에 철과 철이 만나는 부위에 적절한 부속이 없었고, 소리가 너무 크게 났다. 적절한 부속을 사용하거나, 문짝을 나무로 제작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적절한 부속물이 사용되었는지, 대본에 명시된 부속물이 빠지지 않았는지 체크한다. 문의 종류에 따라, 장소의 설정에 따라 꼭 필요한 부속물들이 있다. 매일 별생각 없이 여닫는 현관문을 들여다보면, 최소 4-5가지의 부속물이 부착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디지털 도어락, 문이 닫히도록 하는 도어체크, 외시경, 안전고리, 말발굽 등이다. 만약 대본에서 외시경을 통해 밖에 있는 인물을 살펴보는 씬이 있는데, 현관문에 외시경을 달지 않았다면 낭패다.
일상생활에서 매일 보는 것을 실제로 만들어 보면, 단순해 보이는 것에도 수많은 디테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언가 만들어낸 것이 가짜 같거나 밋밋해 보일 때, 내가 놓치고 있는 디테일이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