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인지 예술 작품인지 헷갈리는 아티스트 북들
여러분, 책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종이 바탕에 빼곡한 글자와 사진들, 넘어가는 책장 등이 떠오르진 않으시나요?
오늘 소개해 드릴 도서들은 현대카드 아트 라이브러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엥? 이것도 책이라고?’ 싶은 도서들입니다.
Book.1 [Artist’s Publishing]
‘The Conquest of Space’, Marcel Broodthaers
Marcel Broothaers의 The Conquest of Space는 작가가 사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출판된 도서이며, 당시 한정판으로 50부만 제작되었습니다. 제목은 영토 정복(The Conquest of Space)을 목적으로 군대에 의해 역사적으로 사용된 세계지도(Atlas)를 의미하지만, 손바닥보다 작은 사이즈로 인쇄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시각적으로 나타낸 도서입니다.
Marcel Broodthaers(마르셀 브로타에스)는 벨기에 출신의 미술가입니다. 그는 특이하게도 시인 및 비평가로 활동하다 40세에 자신은 시각 예술가라고 선언하며 커리어를 전환했습니다.(그 땐 N잡러의 개념이 없었던 걸까요,,?) 그는 예술 활동을 통해 미술계의 제도적 관행에 대해 비판하고,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아이러니가 드러나는 작품들을 제작했습니다. 이 도서 또한 작가가 제작한 하나의 예술 작품인 것입니다.
이 도서는 현대카드 아트 라이브러리에서 [Artist's Publishing Books]라는 카테고리의 서가에 배가 되어있는데, 이 테마의 서가에선 아티스트들이 직접 저자이자, 편집자, 그리고 디자이너가 되어 출판한 도서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기존의 책이 가진 형식과 제작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책'과 '아트'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 그들의 실험정신이 드러나 더욱 보는 재미가 있어 추천드리는 카테고리입니다.
Book.2 [Rarest]
‘Little Red Riding Hood’, Warja Honegger-Lavater
스위스 출신 아티스트 Warja Honneger-Lavater의 작품 <Little Red Riding Hood>입니다. 이 도서는 우리가 아는 고전 동화 '빨간 모자 소녀'를 텍스트보다 상징이 있는 추상 미술로 풀어낸 아코디언 형식의 작품입니다.
Warja Lavater(바르자 라바터)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아티스트로써 우리에게 친숙한 고전 동화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그려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 도서를 읽다 보면 추상 미술임에도 불구하고 초록 나무들이 우거진 숲을 지나 할머니의 집으로 향하는 빨간 모자 소녀와 이미 할머니를 잡아먹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늑대, 그리고 사냥꾼이 늑대로부터 할머니와 소녀를 구해내는 내용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Book.3 [Artist’s Publishing]
‘De ou par Marcel Duchamp ou Rrose Selavy’, Marcel Duchamp, Rrose Selavy ; designed and edited by Mathieu Mercier
"Everything important that I have done can be put into a little suitcase(나의 가장 중요한 작업물들은 모두 작은 여행 가방에 넣을 수 있다)."라고 1952년 뒤샹은 말했습니다. 마르셀 뒤샹의 가장 중요하고 수수께끼 같은 모더니즘 예술 작품 중 하나인 'Boîte-en-valise(부아탕발리즈)'는 그의 예술 작품의 총합이 들어 있는 휴대용 여행 가방입니다. 아마도 다가오는 전쟁을 예감하고, 고정된 주소 없이 수년(1935-41)에 걸쳐 언제든지 쉽게 운반할 수 있는 자신만의 휴대용 미술관을 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 속의 도서는 그러한 뒤샹의 부아탕발리즈를 프랑스의 예술가 Mathieu Mercier가 대중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샘'이 포함된 이 예술 상자는 박물관과 갤러리 시스템 밖에서도 전시하려는 뒤샹의 열망을 엿볼 수 있습니다.
Marcel Duchamp(마르셀 뒤샹)는 프랑스 출신의 예술가입니다. 오늘날 현대예술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며 '현대미술은 난해하다'는ㅋㅋㅋ 인식을 심어주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개념미술의 창시자 및 선구주자로써 다다이즘과 관련하여 레디메이드를 창시한 그의 업적은 가장 널리 알려진 <샘>이라는 작품을 통해 대표됩니다.
그렇다면 도서의 제목에 등장하는 'Rrose Selavy(에로즈 셀라비)'는 어떤 인물일까요? 에로즈 셀라비는 바로 뒤샹의 또 다른 여성 자아입니다. 뒤샹은 가톨릭을 믿는 남성인 자신과는 다른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했습니다. 그 결과로 유대인 여성 Rrose Selavy가 탄생합니다. 이 이름은 프랑스어로 'Eros, c'est la vie(에로스, 그것이 삶이다).'와 동음으로 발음됩니다. 셀라비는 사진작가 Man Ray(만 레이)의 연작으로도 모습을 드러내고(=뒤샹의 여장 사진) 작가로써도 활동하는 등 뚜렷한 정체성을 가집니다.
워낙 유명한 작가라 뒤샹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도서 설명을 위해 정보를 더 찾아보다 보니 완전히 새로운 사실을 접하게 되어 인상 깊었습니다. 실제로 사람은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알고 있는 정보가 많을수록 더욱 흥미롭고 길게 감상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작품을 받아들여도 좋지만, 이렇게 공부하는 시선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좋다는 값진 결론을 얻었습니다.
Book.4 [Rarest]
‘Ultimo Bagaglio’, Hubert Damisch & Ken Lum
Three Star Books에서 출판된 ‘Ultimo Bagaglio’를 소개합니다. 바로 위에서 소개한 도서와 형태가 비슷하다고 여겨지시지 않나요? 맞습니다! 이 도서 또한 뒤샹의 부아탕발리즈를 21세기에 맞춰 재해석한 예술작품입니다.
캐나다 출신의 아티스트 Ken Lum(켄 럼)과 프랑스 출신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Hubert Damisch(휴버트 데이미쉬)가 만나 공동 제작한 이 박스 안에는 데이미쉬가 여행 도중에 한 명상과 기억, 그리고 럼이 유럽과 북미에서 수집한 오브제들이 담겨있습니다. 럼과 데이미쉬 각자의 전문성이 이 상자에 들어있는 오브제들 속에서 하나로 결합된 것입니다.
Three Star Books는 아티스트와 협업하여 아티스트 고유의 실험정신이 묻어나는 도서를 출판하기로 유명한 프랑스의 출판사입니다. 최근 Three Star Books의 공동창립자 Christophe Boutin(크리스토프 부탱)과 Mélanie Scarciglia(멜라니 스꺄시글리아) 두 분이 현대카드 아트 라이브러리에서 운영하는 아트 토크에 초청되어 어떤 식으로 아티스트들과 협업하여 출판 작업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출판사 고유의 도서 제작 노하우를 전달하면서도, 정해진 틀 없이 아티스트의 상상이 그대로 실현될 수 있도록 한다는 그들의 신념 또한 하나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재정의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은 '책'을 재정의한 도서들을 보여드렸는데, 이 도서들의 제작 의도를 이해하고 나만의 시선으로 감상함으로써 아티스트만큼이나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서 목록
-‘The Conquest of Space’, Marcel Broodthaers
-‘Little Red Riding Hood’, Warja Honegger-Lavater
-‘De ou par Marcel Duchamp ou Rrose Selavy’, Marcel Duchamp, Rrose Selavy ; designed and edited by Mathieu Mercier
-‘Ultimo Bagaglio’, Hubert Damisch & Ken L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