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나나
오늘 밤에 뭐해. 한잔할래?
지금도 우리는 가끔 어딘가 허전한 밤이면 서로를 불러내곤 하잖아. 어릴 때처럼 대단한 실연을 겪거나,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배신을 당한 밤이 아니더라도. 가볍게 시작한 한 잔에 별 대수롭지 않은 오늘 이야기, 지나간 옛날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실없이 웃다 보면 평범했던, 또는 조금 힘들었던 하루도 특별해지는 기분이 들어. 우리가 좋아하는 화요에 토닉 워터를 섞고, 얇게 썬 레몬을 한두 조각 넣어 흔들면 그냥은 삼키지 못할 것 같던 술이 쥐도 새도 모르게 꿀떡꿀떡 넘어가는 것처럼.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던 대학교 1학년 처음 만났으니 우리가 서로 안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때의 우리는 과제나 프로젝트로 일주일에 삼사일은 밤을 새우면서도 어디서 힘이 솟는지 주말이면 정말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마셨었잖아. 그야말로 무서운 게 없었지. 대학만 졸업하면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오는 그녀들처럼 멋지게 뉴욕 거리를 걸으며 화려한 삶을 살 거라 상상했잖아. 그때 우리는 홀리 쿨리스의 <버터나이프와 레몬> 속 덩그러니 놓인 두 개의 노오란 레몬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였던 거지. 저 멀리 우뚝 서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나이프를 보지도 못하고 마주 앉아 꼭 붙어있는 그림 속 레몬 두 개가, 앞으로 다가올 사회라는 폭풍을 모른 채 마냥 깔깔거리던 우리를 꼭 닮은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한 우리는 각자의 사정으로 서로 다른 시기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커리어를 망가뜨린 첫 직장에 눈물을 흘려보기도 하고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기도 하면서 인생의 신맛을 온몸으로 느꼈었던 것 같아. 그렇게 20대의 우리는 온 입안 가득 침이 고이고 찌푸려진 미간을 필수 없을 만큼 신 레몬 맛을 보았고, 매끈하고 탐스러운 노랑 레몬 속에 숨겨진 시디신 속살을 알았지.
그럼에도 우리가 무너져 내리지 않고 잘 헤쳐나가고 있는 건 서로가 옆에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랬던 것 같아. 뒤늦게 사춘기가 왔는지 다 크고 나서 방황할 때, 나아갈 방향을 몰라 헤맬 때마다 너는 내게 늘 ‘너는 역시 진짜 대단해.’라며 내가 하는 선택에 모두 힘을 실어 줬어.
미국에는 이런 속담이 있잖아.
“인생이 네게 레몬을 주면, 레몬네이드를 만들어라!”
인생이 시련을 주더라도 주저 앉지 말고 되레 이를 기회 삼아 나만의 방법으로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 가라는 속담.
로라 오웬의 <무제>는 이 속담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것 같아. 그림 속 우스꽝스러운 아저씨 머리 위로 땀샘이 아찔해지는 양의 레몬이 쏟아져 내리고 있어. 주변의 온 세상이 시큰한 노란색으로 가득한데도 아저씨가 약주라도 한잔 걸치신 듯 미소를 띤 채 코로 레모네이드를 뿜어내고 있는 모습에 왠지 모르게 웃음이 먼저 흘러나오지 않아? 아저씨의 어깨에는 왠 파란 새가 한 마리 앉아 있어. 귀에 바짝 붙어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아니면 노래를 흥얼거려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아저씨가 눈을 꼭 감은 채 레모네이드 만들기에만 열중할 수 있는 건 어쩌면 옆에서 끊임없이 응원해 주는 파란 새 때문이지 않을까? 마치 너와 내가 그랬듯 말이야.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삶이 레몬을 건네줄 때마다 그 레몬을 잘라 서로의 술잔에 넣고 흔들어주자. 그렇게 함께 술잔에 담아 삼키고 나면 인생의 그 어떤 쓴맛도 지금껏 해내 온 것처럼 기분 좋게 꿀떡 넘겨버릴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