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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북살롱 Oct 29. 2020

내 옛날 직장 동료 P 씨에게

글: 세잎클로버

내 옛날 직장 동료 P 씨에게


이름을 떠올리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나의 ‘그만둠’을 얘기할 기회가 옵니다. 그중 하나가 ‘첫 직장을 그만둠’이에요. 그때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P 씨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그림과 함께 써 보려 합니다. 


스티브 행크스, <내리는 빗속에서 떠남 Leaving in the Rain>, 아쿠아보드에 수채, 38 x 76 cm


이 그림은 스티브 행크스의 <내리는 빗속에서 떠남>이에요. 스티브 행크스는 ‘현존 최고의 극사실 수채화가’라는 찬사를 받는 화가입니다. 극사실주의 그림은 딱딱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데, 스티브 행크스는 여성, 아이, 가족, 해변, 비 등의 감성적인 주제를 수채화로 표현하여 깊고도 아련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그림을 보시면, 어떤 여인이 주룩주룩 내리는 빗속에서 작은 우산 하나 받쳐 들고 기차역 플랫폼에 앉아 있습니다. 옷차림과 큰 가방으로 봐서는 이곳을 아예 떠나는 것 같습니다. 여인의 둥근 가방의 갈색이 이 그림에서 가장 산뜻해 보일 만큼, 이 그림의 분위기는 어둡기 그지없습니다. 저 멀리에서는 기차가 불을 밝히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내리는 비는 텅 빈 플랫폼을 적시고, 여인의 가방들도 적십니다. 여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여인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지 않을까요. 짐을 단단히 챙긴 것으로 보아 여인은 떠나려는 굳은 마음을 먹었고, 목적지도 정했습니다. 하지만 떠나는 슬픔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P 씨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첫 직장은 제가 가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곳이었어요. 제가 졸업할 땐 IMF의 여파로 웬만한 일자리는 구경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공과 관련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이면 어디나 이력서를 넣었고, 그중 한 곳이 그곳이었어요. 그것도 정규직도 아닌 계약직. 건물은 작았고, 사람들은 유난히도 낯설었습니다. 입사 후 약 1주일을 마음 못 정하고 다녔어요. 1주일째 되던 날, 그날도 정신을 놓고 맥없이 퇴근하던 길, 어째야 하나 고민하던 저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목소리. “왜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어요? 괜찮아요?” 그 사람이 바로 P 씨였습니다. 그때 그 말이 얼마나 따스하게 제 마음을 감싸 주었는지 몰라요. ‘뭐 그렇게 고민해? 일단 닥친 일을 해 봐! 가볍게!’ P 씨의 목소리는 그렇게 말하는 듯했어요. 그래서 그 말 한마디에 저는 마음을 그 회사에 두어 보기로 했답니다. 

회사에 마음을 두니 작은 건물은 정감이 갔고, 일하는 제 책상에는 서류들이 지저분하게 쌓여 갔고, P 씨를 포함해서 마음이 통하는 또래들도 생겼습니다. 밤낮 없이 열심히 일하고 크게 웃고 때로는 울고 크게 화내기도 하면서 1년 10개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퇴사를 좋은 마음으로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동안 회사의 각종 부조리에 쌓여 왔던 분노와 좌절이 터졌고, 새로운 곳을 찾게 했습니다. 좀 더 재미있는 일을 하고도 싶었고요. 그렇게 가고 싶었던 회사에 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고, 합격을 했습니다. 그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실은 나 없이 잘 살아 보시지 하는 마음으로 사직서를 내고, 상사에게 말하고,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업무 인수인계를 하고, 짐을 싸서 부쳤습니다. 라면 상자 두 상자에 제 첫 회사의 추억이 담겼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퇴사 전날이 되었습니다. 퇴근하기 전에 저는 P 씨에게 인사를 하려고 P 씨의 부서로 찾아갔습니다. 그 부서 분들은 다 퇴근하고 안 계셨죠. 퇴사일에 인사해야겠다 하고 돌아설 때, 오랜만의 그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 어깨에 닿는 손, 그리고 경쾌한 목소리. “뭐 해요?” P 씨를 보자마자 주책맞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창피했지만, 엉엉 울어 버렸죠. 내 첫 번째 회사생활을 시작하게 해 준 P 씨를 보니 마음속에서 무언가 울컥했기 때문입니다. 그제야 떠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떠난다는 것은 제가 바친 모든 시간과 공간과 그를 채웠던 사람과의 이별, 그 모든 것들이 떨어져나가는 아픔이었던 겁니다. 



스티브 행크스, <기차를 기다림 Waiting for the Train>, 아쿠아보드에 수채


이별의 슬픔이 가라앉은 다음, 여인의 얼굴에 눈물이 걷혔습니다. 하늘도 어느덧 갰지요. 이제 여인은 한결 정리된 마음으로 이별을 받아들이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마저 이별하고 슬픔을 갈무리한 채 새로운 곳으로 떠났지요. 그래서 그림 속의 여인에게, 이제는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눈물은 곧 그칠 것이고, 가는 곳에서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만날 것이고, 마음만 먹는다면 충만하게 그 시간과 공간을 채울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옛날 시간과 공간을 채웠던 사람들은 또 다른 의미로 즐겁게 추억하거나, 또 다른 기억을 쌓으면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P 씨를 아쉽게도 옛 시간과 공간에 남겨 두게 되었지만, P 씨는 나를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지만, 회사와의 첫 시작과 이별을 함께해 준 P 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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