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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푸집과 조각상]

by 김도형



입체적인 형태를 만드는 방식에는 여러 갈래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 ‘거푸집’이라는 틀에 재료를 부어 형태를 떠내는 방식과, 단단한 재료를 깎아내며 형태를 드러내는 ‘조각’의 방식이 있다.


최근 음악을 이 두 방식에 비유한 흥미로운 글을 접했다. 베토벤은 ‘거푸집’, 모차르트는 ‘조각상’에 비유되었다. 내가 이해하기로 거푸집이란 모든 요소가 처음부터 완벽한 형태로 떠져야 하는 것이고, 조각은 큰 덩어리에서 점점 디테일을 다듬어가는 과정이다.


이것을 연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차르트의 교향곡은 연주 자체의 즐거움까지 고려된 실내악 전통에 속한다. 반면 베토벤은 대규모 공연장에서의 울림과 효과를 염두에 두고 작곡하였고, 이에 따라 연주자들은 하나의 완성된 구조물을 재현하는 기술자 혹은 음악 생산 라인의 노동자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예전에 아내가 첼리스트인 덕에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악보가 모든 것을 규정한다면, 당신은 공연을 위해 기술을 제공하는 기술적 대리인으로 느껴질 때는 없는가?”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질문이었고, 나 스스로도 음악의 세계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던질 수 있었던 질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매우 근본적인 물음이었다고 생각한다.


작품이 완성되는 단계부터 아웃풋을 염두에 두는 사고방식은 과거보다 앞으로의 시대에 더욱 강조될 것이다. 대신 거푸집처럼 정제된 형태로 완성된 예술은 점차 줄어들고, 미완의 조각처럼 보이는 형상들이 예술의 이름으로 제시되며, 그 파편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흐름은 더 많아질 것이다.


나는 늘 그러한 ‘만들다 만 조각상’에 대해, 과연 그것에 어떤 설득력을 담을 수 있는지, 작가에게 묻고 싶다. 그 조각의 파편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단발적 당위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성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싶다. 예술의 힘은 스스로의 당위성이 지속 가능한 설득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발휘되는 것이 아닐까.


#거푸집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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