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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통하는 사회]

by 김도형


요즘, 말이 통하는 사람을 찾기란 참 어렵다. 말이 통하기 위해서는 서로 갖고 있는 언어가 동일해야 하고, 그 언어를 채워내는 기반 지식이나 각자가 생각하는 예의와 화법이 맞아야 비로소 대화가 가능하다.


그보다 앞서,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받으며 기다려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곧,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갖는 일’이라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모르는 것 같다. 그저 말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존재를 인정받는 기회가 되었고, 우리의 말이 세상에 닿을 수 있다는 희망이 삶을 계속 이어가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 대통령이 바뀌면서 정책이나 정치적 방향은 아직 알 수 없지만, 드디어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왔다는 점에서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든다. 수평 구조를 지향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수직 구조와 침묵이 사회적 덕목처럼 강요되던 사회에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들어준 적이 과연 있었던 적이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해결사 이전에 각자의 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최소한의 포용성과 개방성이 아니었던것 같다. 나라를 대표하는 이가 직접 와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를 확인하며 진심으로 귀 기울인 적이 있었는지 돌아본다. 직책이나 과업을 떠나 그저 한 사람으로서 진심 어린 관심과 다정함을 보여주는 이가 있다면, 그 존재만으로도 우리는 미래에 희망을 걸 수 있게 된다. 그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다가온다.


나는 어른이 되려는 모든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타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기다려 들을 수 있었는지, 당신의 의견을 누군가를 깎아내리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뱉은 말에 객관성을 담을 수 있는지 말이다.


항상 나부터 다른 이의 말을 들어주고 기다려주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는지 돌아본다. 말이 통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살아갈 희망을 가지게 된다. 모든 이들이 외로워지는 지금 시대에 대화는 모든 시작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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