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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 우리 현대사회에서 지리적으로 확장해간 방식]

by 김도형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은 기본적으로 서구, 특히 백인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문화 예술 시스템이자 시장이다. 근대 이후의 미술 제도와 전시, 컬렉션의 역사는 서구 중심의 기준을 설정하며 발전했고, 이는 곧 서구의 가치관을 세계에 보급하는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예술은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새로운 자극이 사라지면 그 자체가 신파처럼 느껴진다. 한때 전위적이었던 아방가르드가 결국 키치로 전락하듯, 예술 역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주류에서 벗어나 비주류의 영역에 관심을 돌리거나, 익숙하지 않은 지리적 ‘거리’를 찾는 방식으로 확장을 시도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술계는 서구 백인 중심의 시선에서 점차 다른 집단으로 관심을 옮겨왔다. 흑인 예술과 아프리카 미술이 주목받았고, 이어 라틴아메리카의 문화와 예술이 새로운 감각으로 소비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경제적 성장과 인구 규모, 시장성 덕분에 아시아권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 전쟁과 갈등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다면, 중동이나 오세아니아가 새로운 주목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이 흐름은 ‘다양성’이라는 명분 아래 비주류를 향한 관심으로 표현되며, 현대 미술에서는 퀴어, 디아스포라, 샤머니즘 같은 주제들이 다뤄진다. 비엔날레와 같은 국제 전시는 이러한 새로운 담론을 실험하고 보여주는 장으로 기능해 왔다. 물론 이러한 흐름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것이 현대 사회를 충분히 대변한다고는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는 어디까지나 예술이 지나치게 보편화되고 소비된 뒤 새로운 자극을 찾아 주류에서 비주류로 확산되는 하나의 전략적 과정이지, 진정으로 세계 전체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비엔날레의 많은 작품들은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예술가 개인의 신념과 고집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갇힌 예술성’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예술이 스스로를 자족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물론 상업 미술과 비엔날레는 서로 다른 방향을 지닌다. 비엔날레는 세상의 아픔을 대변하려는 의도로 점점 산으로 가는 듯한 추상을 더해 가고, 상업 미술은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무한히 복제 가능한 이미지들이 넘쳐나며 시각적 가치의 혼란을 초래하는 느낌이다.


결국 두 영역 모두 각기 다른 문제를 안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예술이 본래의 역할과 가치에 대해 스스로 되묻고, 본질을 잃지 않기 위한 성찰을 지속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술이 비주류를 향한 탐색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대중과의 공감대를 유지하는 균형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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