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셉 디자인과 그것을 구현하는 과정에 관한 잡썰
처음에 프로젝트 의뢰를 받았을 때, 조금 당황스러웠던 기분이 들었던 프로젝트입니다. 설치물 디자인을 요청받고 찾아간 현장에서 보너스 같은 느낌으로 얼떨결에 맡게 된 일이기도 하고요. 보드게임 까페라는 것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는데요.
제주도 남쪽 표선에 가면 살기 좋은 리조트가 있는데, 그 해비치 호텔 & 리조트 내부에 있는 공간입니다. 이번 프로젝트 때문에 자주 가게 되었는데, 가족끼리 여행가기 참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무엇보다, 보드게임 까페라니?!
평소에 보드게임을 즐기지 않아서 그런진 모르겠으나 보드게임 까페라고 하면, 굉장히 애매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보면 그냥 보드게임을 할 수 있는 까페 아닌가... 싶고. 까페인데 보드게임을 그냥 쌓아두고 이용할 수 있다면 그것도 보드게임 까페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말장난)
처음에 현장을 답사하자마자, “떠오르는 컨셉 같은 것이 있으신지?” 라는 클라이언트님의 기대에 찬 눈빛이 매우 부담스러웠습니다만
일을 맡기로 한 시점에서, 사실 이미 다른 곳에서 작업한 시안 A,B가 나와있었고 클라이언트는 그 작업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돌고 돌아 우리에게 온 것이며, 그런 이유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발로 찍은 현장의 사진인데요, 휴게 공간과 기념품 판매점으로 이용되고 있었어요. 리조트 공간 내 서비스 상업 공간의 개념으로 보드게임 까페가 필요한 상황인 것이죠. 아시겠지만 발로 찍는 이유는 before와 after의 드라마틱한 차이를 위해서라고 미리 고백합니다.
우리는 굉장히 의욕에 가득차 있었고, 보드게임 까페의 디자인에 한 획을 긋고 싶었지만, 일단은 보드게임 까페를 잘 모르겠으니까 겸손하게 두 손으로 네이버에 키워드 검색을 해 보겠습니다. 한 획은 못 긋더라도 점 하나는 찍어야 되지 않겠어요?
아하, 이런 것이구나. 싶지만 아직도 잘은 모르겠으니까 구글에도 물어 봅니다.
아, 네.. 아직도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얼추 네이버랑 구글이 얘기하는 것들이 비슷비슷합니다. 까페 같은 느낌의 구조를 하고 있지만 책장이 있어서 보드게임이 빼곡히 놓여 있고요. 정신이 없어서 게임 하다가 혼이 빠져나갈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론요. 그냥 다들 저런 형태로 사용해 오다 보니, 공간의 모양새도 저렇게 굳어졌구나, 하는 느낌이 들게 만들죠.
자, 잠깐 이야기가 샜는데요. 공간의 성질을 다시 정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지금껏 누구도 이야기 한 적 없지만 세상의 보드게임 까페들은 다 고만고만한 형태에서 멈춰있었던 것이죠. 우리는 공간의 컨셉을 도출해 내기 위해서 전통적인 형태의 보드게임에 주목하기로 했습니다.
체커, 오델로 등의 보다 더 단순한 형태의 보드게임도 있습니다만 전통적인 보드게임은 적과 내가 겨루어서 승부를 낸다는 가장 기초적인 틀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흑과 백으로 공간을 나누는 것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게임을 즐긴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게임의 본질은 승패에 달려있으니까요.
보드게임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면, 처음에는 그저 백돌과 흑돌로 편을 갈라 단순한 형태로 승패를 나누는 개념에서 출발합니다. 가공하는 기술이라는게 존재하기 전에도, 자연계에 흑돌과 백돌 정도는 있었을 테니까,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출발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매우 초기의 단계에서 우리는 블랙앤화이트, 컨트라스트 같은 개념을 떠올릴 수 있었는데요. 여기에 보다 더 이분법적인 구조를 강하게 더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Side by Side 같은 느낌도..
그래서 흑과 백의 스트라이프를 중심이 되는 모티프로 가져가기로 했고요. 단순하게 흑과 백을 면과 면으로 크게 분할하는 것은 긴장감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편하고 루즈한 느낌도 나쁘진 않지만, 어차피 보드게임을 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의도된 긴장감을 조성하고 싶었습니다. 뭔가를 비튼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그리고 그저 블랙앤화이트가 컨셉이어선 안돼, 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면 흑과 백은 결국 보다 근원적인 컨셉을 구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어야만 하니까요. 그래서 때때로 “공간 컨셉이 블랙앤화이트입니다”, 이런 얘길 들으면 뭔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블랙앤화이트는 컨셉트를 구현하는 수단으로서의 톤앤매너의 개념에 가깝지 컨셉트 그 자체로 보기엔 굉장히 부족한 느낌이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주위에서 소위 ‘힘이 빠진’ 블랙앤화이트의 공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흑과 백, 그리고 강한 컨트라스트와 스트라이프 패턴으로 둘러쌓인 공간이, 그 자체가 게임 같은 하나의 구조 또는 규칙 같은 느낌이 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보드게임 까페이지만 그 완성된 공간의 형태가 굉장히 개념적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랬죠. 굳이 말하자면 컨셉을 위한 컨셉 같은 느낌? 비실용적인 공간처럼 느껴지는데, 보드게임을 하는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그런 공간 같은 느낌이겠죠.
위에서 언급한 흑과 백, 컨트라스트, 스트라이프 패턴을 바탕으로 개발을 스스슥 진행해 봅니다.
이것은 매우 초기 단계의 기초 스케치인데요. 위에서 정리했던 키워드를 바탕으로 개발하되, 구조에서 재미를 더하고자 했던 초기 단계의 작업물이죠.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징검다리 같기도 하고, 게임 속에 나올 법한 장치 같기도 하고요. 뭔가를 비틀어서 긴장감을 조성하고 싶었는데, 레이아웃 자체를 비틀었어요. 사선 형태의 파격적 레이아웃에, 인포데스크부터 테이블까지 단일 구조의 디자인으로 정리되는 것이 핵심이에요. 음료 서빙이 외부에서 이루어진다는 오퍼레이션의 특징도 구조를 단순화하는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스트라이프 패턴은 구조를 타고, 천정으로 올라가 라이팅으로 적용이 됩니다. 결국 스트라이프로 이루어진 선형 구조가 뒤에 있는 거울 벽을 통해 무한 반복되는 형태가 만들어져요. 바닥에서 벽을 타고 올라가서, 다시 바닥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게임은 승패가 나눠지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툴툴 털어버리고서요. 이러한 구조는 게임의 룰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말장난 죄송...)
어쨌건 승패가 갈리더라도 게임은 게임이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회귀, 반복, 순환, 카르마 뭐 이런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불교..
윤회..
앗 너무 나갔나.
천정을 가로지르는 스트라이프는 조명으로 기능하지만 동시에 구조를 유지하는 핵심 자체이기도 해요. 위의 이미지는 굉장히 러프한 초기의 디자인 개념이지만 이러한 구조로 모든 것이 시작되고 또 끝나는 겁니다.
바닥과 책상의 높이로 인해 패턴의 리듬이 존재하는 것처럼, 상부의 조명에도 결은 다르지만 꺾인 형태의 디테일로 변화를 주고 리듬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비틀어진 컨셉이 핵심이었기에 이러한 구조가 유지되기 위해서 천정라인, 바닥라인, 가구라인이 딱 떨어지도록, 정밀하게 설계하고 또 시공으로 완성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사실 제주도에서 매우 중요한 가구를 제작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만, 제주도에서 가장 퀄리티있는 가구 공사를 다 도맡아 하시기에 믿고 갔는데, 정말 장인이셨습니다. 훌륭하게 만들어 주신 덕분에 다른 고생을 하지 않았지만 사실 제품 받기 전까진 계속 마음 고생이었음 ;; 잘 나올까 잘 나올까.. 후달리는 기분이었어요.
가구 위의 스트라이프 패턴이 바닥, 그리고 벽을 지나, 천정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것이 포인트였죠. 이러한 디테일한 작업을 통해서 게임의 요소들, 게임 속에서 이루어지는 반복적인 행위를 시각화시키고, 또 공간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해 많은 노력과 연구를 거듭하면서 작업을 진행해 나갔습니다.
게임에서 쓰는 말 같기도 하고, 장난감스러운 요소도 있는 마음에 드는 스툴입니다. 기성 제품이지만 이러한 가구가 더해지면서 게임 속 세상이 되는데에 포인트가 될 거라 생각했어요. 과하지 않은 컬러 라인도 괜찮은 것 같고요.
기본적인 컨셉트가 한 번에 통과되었기 때문에, 굉장히 빠르게 일이 진행
되었을 것 같지만... 실무적으로 조율해야 할 내용들, 커뮤니케이션의 오류 등등이 쌓이고 쌓여서 디자인을 다듬고 정리하는데에 꽤 많은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원래 트멍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는데 (제주도 말인데, 틈이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작업 진행 중에 공간의 이름이 모드락으로 변경되기도 했고요. 덕분에 초기 아이디어에는 틈을 연상시키는 요소들도 있어서 이름이 변경될 때 머리가 아팠다는 카더라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변경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많은 디자인 요소들이 정리되었어요.
이러한 개발 과정에서 드랍되었던 디자인을 잠깐 소개해 드리자면,
이러한 스케치 인데요. 기본적인 컨셉트의 출발선은 같습니다만,
위의 개념 같은 형태, 굉장히 정형화 된 질서를 보다 더 강하게 추구하고자 했던 스케치입니다. 컨셉 스케치 단계였지만 컬러 뿐 아니라 텍스쳐의 질감을 대비시키고자 했던 생각이 반영되어 있었고요. 그리고 패턴이 강하지만 질서와 각이 착착 맞도록 해서 밸런스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믿었습니다만 ㅜㅜ 드랍됨
자, 원래 디자인으로 돌아가서.
언제나처럼 서울에서 사전 제작해 본 테이블 상판 샘플입니다. 완성 버전이랑 스트라이프 간격이 달라요, 초기 버전이라. 하지만 스트라이프 패턴이 깔끔하게 구현되느냐의 여부가 정말 중요했고, 보드게임을 위한 적절한 사이즈를 찾기 위해서도 필요했던 작업인데요.
각 면마다 1명씩 앉을 수 있는 형태로 프로토 타입을 작업했으나, 레이아웃의 유지와 협의 과정에서 직사각형 타입의 형태로 최종적으로 바뀌게 돼요.
이건 저도 몰랐던 굉장한 고급 정보인데, 요즘 모노폴리는 지폐 대신 저렇게 카드기가 포함되어서 나옵니다. 어렵게 지폐 계산할 필요 없어요. 긁으면 됩니다. 진정 이거야말로 보드게임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작업은 뒷전이고 게임만 했다 카더라
그리고 모퉁이에 위치한 대형 보드게임존입니다. 바닥에 놓고 해야 하는 거대한 게임들을 편한 빈백 위에 앉아서 즐길 수 있도록 했는데요. 바닥 패턴은 공간의 사용 양식이 변한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주는 일종의 변주라고 볼 수 있어요. 대형 보드게임존은 상단부 높이도 살짝 낮추어서 자연스럽게 앉을 수 있도록 의도했습니다.
완성샷인데, 대형 보드게임 존은 이런 느낌입니다. 3가지의 바닥 패턴이 부딪히는 연출이 굉장히 재미있어요. 그리고 벽면의 거울을 통해 스트라이프 패턴은 계속 이어지고 또 순환하게 돼요. 단순히 좁은 공간을 넓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구조의 연속성을 유지시키고자 했습니다.
피아노 건반 같은 불규칙한 패턴은 뭐랄까. 규칙적인 삶에 지친 현대인의 라이프 스타일에 위안을 주는 한 모금의 오아시스.. (죄송)
시공이 까다로운 설계라고 원성을 들은 것은 아마도 영광의 상처 같은 거겠죠.
상처 뿐인 영광이었다 카더라
디자인은 위에 보시는 것처럼 개발 및 정리가 싹 끝나게 되고요. 구조가 참 아름답습니다. 단순함의 미학. 공간이 넓진 않지만 패턴을 재미있게 활용했기 때문에, 위치와 시선에 따라서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가 있어요. 아래에 있는 공간 사진 링크를 보시면 알 수 있을 거에요. 패턴이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참 다양한 느낌.
최종적으로 정리되는 형태의 파사드 디자인은 위와 같습니다. 굵기와 간격을 변화시켜서 좀 더 다이나믹한 분위기를 주고자 했어요. 우려할 수도 있는 부분인데요. 호텔 자체의 톤과는 차별화가 되는 방향이긴 합니다만, 사실 해비치 리조트 안에는 엔터테인먼트의 성격을 가진 공간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곳 또한 살짝 기존의 리조트 호텔의 톤앤 매너에서 비틀어져 독자적인 톤앤매너를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모드락 보드게임 까페 역시 조금 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형태로 강하게 작업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모드락이라는 이름은, 물어봤는데 설문에서 정해진 이름이라고만 하고 의미를 알려주진 않더라고요. 재미있게 작업해서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왔으니까 모두+락(樂) 정도가 아닐까 하고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 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즐거우면 되지 않을까요?
게임의 결과는 승패가 나뉘지만 과정 자체로 즐거울 수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디자인 역시 작업하는 과정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요.
외부에서 본 긴 면입니다. 보드게임을 가급적 심플하되, 네이키드하게 보여주고자 했어요. 스토리에 쓰인 사진 중 멋있고 아우라가 넘치는 사진은 여인우 작가님이 작업해 주셨습니다.
어찌저찌해서 결국 무사히 돌아오긴 했지만요. 공항 난민 체험은 처음이었다는 점에서 생뚱맞은 한 획을 그은 프로젝트였다고 자평하고 싶습니다. 후후.
시공을 맡아 수고해 주신 위상공간과 해비치 호텔 사업개발팀 / 시설팀에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Project Management : 김형진 / ARTEFACT
- Spatial Designer : 강예경 / ARTEFACT
프로젝트 문의 : contact@artefact.co.kr
인스타그램 : @artefact.kr
웹사이트 : http://artefac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