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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윤 Nov 27. 2022

나는 너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타인의 고통'과 '우정'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들

 저녁 식탁을 차려놓고 뉴스를 틀면 한 때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소식이 연일 헤드라이트를 장식했던 기간이 있었다. 무모하게 전쟁을 이어가는 푸틴과 국가 간 전쟁 중에  죄 없이 희생되는 수많은 우크라이나 민간인들, 간혹 들려오는 강간당하는 여인들에 대한 뉴스와 함께 끔찍한 전쟁의 참상을 보면서 밥맛이 뚝 떨어졌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전쟁의 잔혹함 앞에 절규하는 사람들을 지구 한 켠에 두고 나는 뉴스를 보며 통곡을 하거나  밥 먹기를 그만 두지는 않았다. ‘푸틴, 이 XX!’ 나의 분노와 공감은 여기까지였다. 

 이태원 참사 때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은 같은 국가,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나와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한 민족에게 일어났던 일이었고, 희생자들의 대부분은 제대로 펴보지 못한 꽃들이었기에 더 충격적이었다. 먹던 밥이 위장 중간쯤에 딱 얹혀 그 땐 이틀 내내 고생을 했었다. 그러나 기력을 회복한 이후에 나는 멀쩡하게 다시 밥을 먹었고 일상을 이어갔다.     

 오늘, 독서 모임의 발제 목록에서는 사람의 고통이나 기쁨, 감정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성향인지에 대한 문항이 있었다. 이 발제를 보고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공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이번 모임의 책이었던 ‘로기완을 만났다’에서는 이런 대목이 있다.

 ‘지갑 속의 기념사진, 일주일 단위로 약속과 일과를 적어 내려간 수첩, 여권 속의 스탬프들, 어딘가로 들어갈 수 있는 녹슨 열쇠나 읽고 있던 책의 접힌 페이지 같은 것들은 우리 삶의 부분적인 단서는 될 수 있을지언정 생애 전체를 관통하지는 못한다.’ 


 같은 맥락으로, 내가 상대방이 되어보지 않은 이상, 그 사람의 고통을 관통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 어느 정도 이해는 하더라도 그건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사람은 자신의, 어쩌면 무의식에 있을지도 모르는 내밀한 치부까지 드러내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에, 상대방의 고통을 관찰자 입장에서 통렬하게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훌륭한 문학성을 가진 문학작품, 뛰어난 연출력을 지닌 영화작품으로 서사화되고 예술화 되어 구체적으로 내 눈 앞에 펼쳐졌을 때만이 비로소 제대로 감정이입을 할 수가 있는 것 같다. 내가 주인공에게 ‘빙의’가 되는 경험, 그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상대방과 나를 동일시하게 되었을 때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얘기이다. 그것이 과거 나의 경험과 겹쳐지면 완벽한 감정이입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남에게 관심이 없다는 얘기도 있듯,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동물이다.  '타인의 고통'의 저자 수전 손택은 인간은 심지어 남의 고통을 은근히 즐기기까지 하는 심리가 있다고도 꼬집었다. 저널리스트인 그녀는 기사에 나가는 사진이 잔혹할수록, 끔찍할 수록, 더욱 자극적일 수록, 사람들의 이목과 인기를 끈다고도 했다. 아, 여기까지 얘기하면 진짜 우울해 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마지막 대사처럼 타인을 완벽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섣부르게 도와줄 수조차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다고 했다. 나는 이 대사를 듣는 순간, 그 말 뜻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리고 공감했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로써 그냥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갑자기 더 슬퍼진다. 모든 여건이 더 없이 힘든 상황에서 서서히 등을 돌리는, 가장 친했던 친구는 모든 면에서 이해받을 수도, 또 용서받을 수도 없는 존재라고 해도 좋은 걸까. 그렇게 얘기하고 싶은 나는 또 이해받을 수 있을까. 그 친구에게 내 고통과 외로움의 공감을 바라지 않았었다. 그저 날 변함없이 대해주기만을 기대했었지만. 그러나 그것 역시 그 아이를 향한 나의 지나친 바람이었나 보다. 별 탈 없고 나쁠 것 없던 시절에만 호기심을 보이고 곁에 머무르려 했던 우정을 과연 진짜 우정이라고 말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아니, 확실히 그건 우정도,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을 비로소 받아들이려고 한다. 


 독서모임을 하고나서 돌아오는 길이 유독 쓸쓸하게 느껴지는 날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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