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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윤 Dec 29. 2022

개에게 감정과 사고능력이 있나요?

육식의 즐거움과 동물의 영혼

 식사를 하는 중에는 뉴스를 시청하지 말아야 한다. 2,3년 전 쯤 저녁식사 중 봤던 뉴스에서는 초복을 앞두고 도살장으로 운반되는 개 무더기(?)에 관한 보도를 하고 있었다. 트럭 짐칸, 새장과 같은 큰 철창살 안에 서른 마리쯤 되었을까, 누렇고 덩치 큰 개들이 비좁은 공간 안, 작은 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켜켜이 적재되어 있던 모습은 말 그대로 개 무더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트럭 뒤에 마구 구겨서 집어넣은 짐짝, 그들은 살아있었으나 이미 고기 덩이였다. 공포에 떨고 있거나 혹은 이미 체념했거나, 뉴스에서 스쳐갔던 그 짧은 순간에 개들의 표정과 눈빛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이러니 밥 먹을 땐 가능하면 뉴스채널을 피해야 하는 거다. 어떤 역한 보도가 날 덮칠지 모른다.


 반려견, 반려묘를 키워 본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그들이 사실은 우리와 똑같은 희노애락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각자가 뚜렷하고도 고유한 개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깊고 치열하게 생각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인간들은 아예 모르거나 혹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신중한 성격인 멍구(유튜브 스타견)는 엄마 아빠가 동시에 자신에게 오라는 신호를 보냈을 때, 실은 엄마에게 가고 싶은 마음을 숨겼다. 밑의 두 동생들이 모두 엄마를 선택한 상황과, 홀로 분투하는 가련한 아빠의 모습을 보고 어쩔 줄을 몰라 했던 멍구는 끝내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산책할 때 다소 제멋대로인 마리(우리 집 막내)는 보호자를 너무 애먹였다고 느낀 날이면 일단 야단을 맞을 각오를 한다. 집에 돌아와서는 보호자의 다른 지시를 기꺼이 받아들일 자세를 보이는데 이때가 이 아이에게 밥을 먹일 절호의 기회이다. 좀처럼 먹으려 하지 않는 사료를 밥통에 왕창 부어주면 마리는 어쩔 수 없이 열심히 먹어주는 척을 하는 것이다. 꾸역꾸역 밥을 삼켜주는 이 아이가 어떨 땐 정말 사람 같다.      

 


 난 사람에게 정말 영혼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영화 아바타처럼 인간의 의식만을 쏙 빼서 다른 몸으로 옮길 수 있는 일이 먼 미래라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왜냐면 어떤 과학자는 사람의 성향, 인성, 사유하는 모든 것은 영혼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뇌의 작용일 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뇌가 죽으면 영혼도 사라진다. 뇌를 이식하지 않는 이상 의식만을 빼서 어떻게 다른 몸으로 이식할 수 있단 말인가.

 실제로 대뇌반구의 앞부분에 있는 이마엽을 제거했을 때, 사람의 성격이 완전히 변한다고 한다. 특히 고집이 쎄고 공격적인 성격을 온순하게 바꿔놓는 데에 효과적이어서, 190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이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물론 심각한 부작용으로 인해 현재는 이 위험천만한 수술을 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영혼이 차츰 없어진다고 비유하는 치매증상도 엄연히 따지자면 뇌의 손상일 뿐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개나 고양이에게도 똑같이 그것이 있다고 본다. 감정과 사고가 가능한 그들의 지능이 인간보다 다소 떨어질지언정, 느끼고 생각하는 건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피가 뭉근하게 배어나오는 소고기를 보면 마냥 편하지만은 않게 되었다. “스테이크 굽기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물어오면 당연하듯 “미듐이요.” 했던 나였다. 사실 소고기는 지금도 여전히 맛있다. 생선의 비린 냄새를 유독 싫어하여 어려서부터 열렬한 육식파였던 내가 요즘 들어 새삼 고기 씹는 행위가 불편해진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더더군다나 돼지는 개와 고양이보다 더 지능이 높다고 하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돼지의 더러운 사육환경을 알고 나면 높은 지능을 갖은 그들이 평생을 학대받다 도살된다는 사실을 아예 모른 척하고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지에 대한 강한 의문을 품게 된다. 삶의 모든 시간을 오로지 식용의 목적으로 길러지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원래 성향은 깔끔한 동물인데, 제가 싼 똥오줌 위에서 뒹굴다 죽는 그들을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있자면, 내가 정말 아무 생각 없는 인간이 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도 고기는 여전히 맛있다. 이 사실에 난 묘하지만, 적지 않은 부조리를 느낀다. 난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육식이 그저 편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어떤 경계에 와 있다는 건 알겠다.     

 

 ‘타인의 고통’은 사람에게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지구 어디쯤에서 전쟁과 기아와 같은 고통에 몸서리치는 민족에 관한 저녁뉴스를 보면서도 맛있게 식사를 즐길 수 있고, 미술관 액자에 걸려있는 그림 대하듯 감상까지 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인데, 거기에 모든 가축의 고통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숨긴다면 사람들은 일부러 그것을 꺼내어 보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가 도살되는 장면, 오래 전에 우연히 보게 되었던 2분가량의 그 짧은 영상은 지금까지도 2분동안의 모든 순간들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고압의 전류로 순식간에 행하는 일이라 도축되는 동물은 고통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고 누가 그랬었나. 도살을 기다리는 소는 줄을 선 채로 앞서 살육되는 동족의 모든 것을 목격한다. 자신의 순서가 다가오자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는 소와, 그런 아이를 앞으로 보내기 위해 긴 전류 봉으로 고문을 가하는 사람, 그 뒤의 장면은 말하고 싶지도 않다. 끔찍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과정을 목격하는 일로부터 안전하다. 마트와 식탁 앞에는 항상 잘 손질되고 깨끗한 고기만이 놓여있고 우리는 그 맛을 즐기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혐오의 홀로코스터가 이웃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었을 때, 유럽전역에서 모든 이가 그 사실을 막연하게라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외면하고 침묵했던 일과 비유한다면 나는 너무 나간 것일까. ‘어쩔 수 없는 일’, 그 때 그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마리를 만나면서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개와 고양이 뿐일까, 어떤 동물이든 반려동물로써 자신의 인생을 함께하기 시작하면, 동물을 식용가축으로 별도 취급하는 일에 대하여 한 번 쯤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반려견을 자식과 같이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오는 감정과 딜레마를 아직까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PS.

 아, 브런치에 올릴 이미지를 찾기 위해 검색창에 ‘개고기’를 입력하고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경험을 했다. 끓는 솥에 들어간 마냥, 한계를 시험하는 사진들에 분노가 폭발하려 한다. (그 사진들은 너무 자극적이고 역해서 여기에 올리지 않겠다.)

  딜레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다른 건 몰라도 개고기 반대 법안은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

 개를 식용 가축으로 사육하는 건 현재 법으로 허용되지 않고 있다. 허가받지 않아 어떤 기준도, 규율도 없는 개농장의 사육환경이 어떨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개농장에 비하면 돼지우리는 아마 안락한 안방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설령 개 도축이 합법화 된다 하더라도 개를 인도적으로 도축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개는 자신의 신변이 위험에 처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맹수와 같은 공격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도축하는 동물에게는 주사용 약물을 주입하는 안락사를 행하지 않는다. 고기의 맛과 질을 위해서 그들에게 가하는 가장 인도적인 방법이 고압 전류 도축방식이지만 이 방식을 행하는 과정에서 개들의 공격성 때문에 한 번에 쉽게 도살되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어떤 방식이든 개를 죽이는 방법에는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방법이 가해질 수밖에 없다. 

 적어도 가장 오랜 역사동안 사람과 가장 친밀하고 가까웠던 동물이다. 인간의 ‘대표적인 반려동물’이라고 할 수 있는 개를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들 먹을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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