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한 해외 출장..?
- 에피소드
S는 처음으로 유럽출장을 간다. 출장에서의 주된 업무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대학 시절 경험했었던 유럽여행에 대한 기억이 워낙 좋기 때문에 출장 전부터 잠도 못잘 정도로 설레는 중이다. 고풍스럽고도 세련된 여러 도시와 웅장하고 찬란한 문화유산, 지역 곳곳에서 느껴졌던 자유분방한 공기를 지닌 유럽은 무슨 목적으로 가든 상관없이 좋은 곳임에는 변함이 없다. 출장일정은 9일. 토요일부터 그 다음 주 일요일까지, 주말 4일을 꽉 채워서 9일이다. 일요일에 귀국하여 다음날 월요일 바로 출근하는 일정이라 돌아오면 피로가 폭풍처럼 밀려올 테지만 S는 상관없다. 지금 당장은 갑갑한 사무실을 벗어난다는 생각에 그녀는 마냥 좋기만 하다.
짐은 비교적 가뿐하다. 갈아입을 옷 몇 벌과 세면도구 등, 최소한의 짐만 챙기고는 있지만 그 최소한의 짐을 담는 캐리어는 갖고 있는 것들 중 가장 큰 ‘특 대형’ 사이즈를 선택한다. 이 안에 유럽 각 지역에서 구매할 오리지날 옷 샘플들을 꽉 채워 넣어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아침 7시 반까지 공항으로 모인 디자이너들 손에는 똑같이 특 대형 캐리어들이 가볍게 들려져 있다. 이코노미석에서 웅크리고 앉은 채로 불편하게 열세시간을 비행해야 하지만 개의치 않다. 회사에서 늘 사람과 마주하며 협업해야 하는 패션 디자이너인 S에게 오롯이 혼자일 수 있는 이 열세시간은 더없이 귀중하게만 느껴진다.
영국런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프랑스파리 – 이태리 밀라노. 일주일 남짓한 기간에 서유럽의 주요 패션도시를 모두 들리려면 시간을 쪼개어 써야한다. 그래서 이동은 주로 밤 시간에 하기로 한다. 출장 중의 주요 업무는 도시의 유명 백화점과 로드샵을 콕콕 찝어 쇼핑하고 또 가장 중요한 ‘몰래카메라’를 찍는 것이다.
첫 도시는 런던이다. 세계적인 주요 패션도시인 만큼 관광 스팟spot인 유명백화점들이 많다. 디자인팀은 해러즈(Harrods), 하베이 니콜(Harvey Nicole), 존 루이스(John Lewis), 리버티(Liberty) 등의 유명 백화점을 이틀에 걸쳐 모두 돌아보기로 한다. 명품관이나 고가브랜드에서는 회사 자금사정상 샘플을 한 두 벌씩 밖에 구매 못하니 이들 브랜드의 매장으로 들어서자마자 그 밖의 다른 옷들은 최대한 카메라에 사진을 많이 담아두어야 한다. 문제는 백화점 허가를 받아야 상품촬영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허가 받는 절차는 까다롭고 자격도 되지 않으니 패스하기로 한다. 목적이 ‘시장동향 조사’ 가 아닌 ‘디자인 카피’ 라는 것을 백화점 관계자들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기에 사진 촬영을 허가해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백화점 안으로 진입했다. 디자인팀은 국내에서 활약했던(?) 능숙한 솜씨로 재빨리 몰카를 찍는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상품의 디테일한 사항까지 찍을 수가 없다. 디자인디테일까지 카메라에 담으려면 상품을 탈의실에 들고 들어가 찍어야 한다. S의 디자인팀은 실장까지 여섯 명, 막내 디자이너를 제외한 네 명의 디자이너가 각자 다섯 벌 이상의 옷을 한 아름 안고 탈의실 앞에 줄을 선다. 이쯤 되면 벌써 매장의 직원들은 수상쩍은 이들의 동태에 이들이 해외에서 출장 온 패션디자인 팀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인가. 간단하다.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그냥 찍으면 된다.
하지만 ‘Maju'의 열렬한 팬인 실장은 이 매장에서 진상을 부려도 너무 부리는 중이다. 자켓, 점퍼에서부터 셔츠, 티셔츠와 팬츠 청바지의 전 아이템에 걸쳐서 어마어마한 옷 무더기를 팀원들에게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S와 동료들은 피로한 몸을 끌고 탈의실에 들어가는 일보다 이런 행동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예의주시하고 있는 매장 매니저와 직원들의 눈길이 더 고통스럽다.
‘제발 옷 갈아입는 도중 직원이 문을 열거나 두들기지 않았으면..’
하지만 여우같은 실장은 먼저 선수를 친다. 자켓과 바지 두벌에 대해 먼저 결재를 하겠다고 말하며 재빨리 카드를 내미는 전략(?) 을 구사했다. 그 사이에 팀원들은 탈의실에서 미친 듯이 몰카를 찍어대고 있다. Maju 매장의 직원들은 도둑맞은 디자인 20벌 중, 2벌을 온전히 제값 받고 팔고 퉁 치는 것이 정당한 거래인지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지만 어서 이 짜증나는 사람들을 내보내고 싶은 마음에 결국 참기로 한다. S의 일행은 무사히 백화점을 빠져나온다.
S의 디자인팀은 백화점을 탈출(?) 하고 옥스퍼드 거리로 나왔다. 로드샵load shop의 상품은 백화점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기 때문에 몰카 임무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저 많이 사고 말 그대로 쇼핑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로드샵이 펼쳐지는 쇼핑 거리로 나온 순간만큼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다. 디자인팀은 잠시 어느 디저트 카페에서 쉬기로 한다. 퉁퉁 부은 다리를 만지면서 타르트와 밀크티를 마시는 잠깐의 여유는 꿀같이 달다.
“S, 그냥 잘 거야?”
호텔방, 밤 열시쯤 잠이 들려던 S를 옆 호실의 동료디자이너가 전화로 깨운다.
“그래도 첫 유럽출장의 첫 밤인데.. 클럽엔 가야지!”
그렇다. 이대로 잠들기에는 아쉽다. S는 생각한다. ‘나는 아직 젊고 오늘은 나름 역사적인 날이다.’ 침대시트를 박차고 다시 풀 메이크업을 하기 시작하는 S,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섹시한 블랙 미니드레스를 챙겨왔는데 잘 됐다 싶다. 음악과 물이 좋다고 소문난 MOS에서 S와 친구들은 지금까지 업무를 통해 받았던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풀기로 결심했다. 역시 런던의 클럽도 자정이 되어서야 휘황찬란해지기 시작한다. 음악과 춤, 술과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진 런던의 클럽에서 이들은 맘껏 밤을 불태우고 있다.
실컷 놀고 꼭두새벽이 되어서야 호텔로 복귀한 이들은 쉬는 텀term 없이 이어지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모두 감당해야 했다. 클럽은 런던 한 곳 만으로 족했다. 암스테르담, 파리, 밀라노에서도 런던 한복판에서와 같이 모든 유명 백화점을 헤집고 다니면서 몰카를 찍고 양손에 한가득 쇼핑백을 짊어지고 돌아다녀야 하는 업무패턴은 반복되었다. 낮에 시간을 아껴야 하므로 이동은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 클럽에서 날 샌 것을 합치면 출장일정 9일중 제대로 발을 뻗고 자는 날은 불과 3일밖에 없었다.
사람 몸집보다도 더 거대해 보이는 캐리어는 구매한 샘플을 감추는 용도로 사용된다. 얼마어치를 사건, 세관신고는 하지 않는다. 경비절감 차원의 ‘탈세’행위는 의류회사들의 관례(?)이다. 거대한 트렁크를 끌고 태연한 척 입국하지만 팀원 중 하나는 반드시 세관에 걸리기 마련이다. 운 나쁘게도 S는 자신의 트렁크를 세관 직원들 앞에서 활짝 열어젖히는 수모를 당하고야 만다. 고되었던 출장은 막판까지 파란만장했다.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패션 디자이너의 해외 출장은 ‘업무를 빙자한 해외여행(국내의 공무원의 출장이 이렇다지?)’ 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오로지 치열하게 일하기 위해서 유럽과 미국, 일본과 홍콩출장을 간다. 종일 녹초가 되도록 시장조사를 하고 양손 한 가득 참조용 오리지날 샘플을 구매하여 들고 다닌다. 체면 불사하고 몰래카메라를 들이대고 대형 캐리어에 샘플을 우겨 담아 낑낑대며 귀국해야 한다.
사람들은 세계 패션도시를 두루 돌아다니며 트렌드 조사를 하고 쇼핑을 즐기는 디자이너가 멋지다고들 한다. 그러나 열심히 몰래카메라를 찍다가 들켜서 망신을 당하는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과연 그래도 멋지다고 해줄 수 있을까. 매장 직원이 경비원에게 호출을 하고 이어서 블랙 정장을 입은 집체만한 남자가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씬을 보고 있노라면 이 때 느끼는 공포감은 공포영화를 볼 때보다도 더 무섭다. 주어진 업무에 충실하기 위해 몰래카메라를 열심히 찍다보면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을 겪는다. 디자이너들 거의 모두가 각자 ‘말할 수 없는 비밀’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출장 일정이 끝나고 회사에 복귀하는 날 아침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 온갖 샘플과 컨펌서가 거대한 산을 이루며 쌓여있는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일주일에서 열흘간 본사 업무에 손을 못 댔으니 그 동안의 밀린 일 더미는 리얼하게 시각화되어 놓여있다. 출장 후에 가장 먼저 할 일은 이 산더미를 눈앞에서 빨리 치우는 것이다. 주말을 꽉 채워서 일한 보상으로 대체 휴가 따위는 회사에서 주지도 않지만 만약 준다고 해도 고사하고 싶을 정도이다. 밀린 일을 쳐내느라 우리는 또 철야모드에 돌입한다. 패션디자이너의 퇴직 시기는 보통 40대 초반에서 중반 사이인데 더 오래 일하고 싶어도 아마 체력이 받쳐주지 못해서 못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초강의 업무강도를 버틸 만한 체력을 40대 중반 넘어서도 유지하려면 돌연변이로 태어나거나 굉장한 ‘워커 홀릭’인 비정상적인 타입의 사람만이 가능하다. 디자이너가 천직이라고 믿을 만큼 옷을 좋아하는 이에게도 쉴 틈이 없는 타이트한 스케줄과 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없는 근무환경이 지속되다 보면 금방 지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로의 출장은 정신적으로 지친 디자이너에게 리프레시refresh하기에 좋은 경험이기는 하다. 디자이너 몸속에 흐르는 쇼핑본능(?)을 충족시키기에도 해외 출장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이다. 비록 내 것이 아닌 회사 소장용이더라도 예쁘고 세련된 최신 아이템을 구매하는 것은 쇼핑을 좋아하는 디자이너에게는 어찌 되었든 즐거운 일 아니겠는가. 양 손 가득히 쇼핑백을 들고 뉴욕의 맨해튼과 소호거리를 누빌 때에는 내가 마치 로맨틱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비록 대여섯 명부터 많게는 열 명 남짓한 인원이 단체 쇼핑관광을 다니는 모양새가 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리만족의 공허함은 업무용 샘플을 사면서 간간히, 그리고 눈치껏 개인쇼핑을 하는 기쁨으로 쏠쏠하게 채우면 된다. 회사의 지원을 받고 약간은 고된 쇼핑여행을 왔다고 생각한다면 힘든 출장이 마냥 피로하지만도 않다. 대단히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마인드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밤에 동료들과 클럽에 가는 것도 짜릿한 경험 중 하나이다. 젊지 않으면 못하는 극한 체력테스트 같은 짓이지만 유럽도시의 클럽 방문은 출장 중의 꽃이므로 권할 만하다. 하지만 몰래 약을 팔러 돌아다니는 마약 밀매상들이 있으니 이 점만 각별히 주의한다면 문제없다. 한국처럼 여자들에게 몰래 약을 먹여 강제로 성폭행을 시도하려는 끔찍한 남자들도 없다. 그저 맥주나 마음껏 마시면서 음악에 몸을 맡기고 신나게 놀면서 쌓여있었던 스트레스를 다 날려버리는 것이 순수한(?) 우리의 목표이다. 그러나 순박하게만 놀기에 영국 훈남들은 너무나 잘생기고 세련되었다. 게다가 이들은 상냥하기까지 하다. 런던의 유명한 주요 클럽에는 도처에 니콜라스 홀트Nicholas Hoult (영국의 배우) 급의 훈남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이들을 그저 그림처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일 텐데 같이 어울려 춤을 추는 것은 상상만 해도 황홀하지 않은가.
노천카페에 앉아 유럽의 아름다운 도시와 풍경을 감상하는 잠깐의 휴식도 우리에게는 쿨하고 낭만적인 경험이다. 가끔 마주치지만 종종걸음으로 온갖 백화점을 헤집고 다니는 이들은 한국에서 온 디자이너 출장 팀뿐인 것 같다. 유럽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노라면 그들에게는 모두 한결같은 여유로움이 있다. 그 점이 나는 매번 부러웠다. 화장기 옅은, 때로는 아예 민낯인데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예쁘고 개성 있는 여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마론 인형과 같은 외관을 지향하고 똑같은 얼굴로 성형을 하는 서울 여자들, 최신 유행을 쫓아가느라 서로 비슷비슷한 차림새를 하고 민낯이라도 드러내면 큰일 나는 줄 알며 너도 나도 풀 메이크업 상태인, 서울패션 스트리트 한복판의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