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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테스킹의 신

by 이라IRA

- 에피소드


짧기만 했던 아득한 주말이 끝난 월요일 아침, S는 이번 주의 살인적으로 타이트한 스케줄 안에서 행여나 중요한 업무를 놓칠까봐 한 주간의 타임 스케줄 표를 수첩에 미리 작성해 놓기로 했다.

디자이너는 너무 여러 가지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해 내야 하기 때문에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는 것이 편한 성향인 S는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그래서 매일 타임스케줄 표(업무일지)를 작성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번주 목요일 가장 큰 대행사와도 같은 품평이 있다. 화요일까지 완성되는 품평샘플들을 수거해서 체크하고 정리해놔야 하는 일이 가장 큰 업무. 샘플 중에서 혹시 잘못되어있거나 핏이 좋지 못해 못생겨 보이는 아이들은 바로 수선실로 보내 예쁘장한 아이들로 바꿔 놓아야 한다. 샘플실 선생님들이 자신들의 주 업무를 제쳐두고 품평샘플을 기꺼이 수선해 줄지는 미지수지만 일단 애교와 친절을 담은 미소를 띠고 샘플을 무조건 들이 밀어놓고 봐야지..


아 근데 하필 화요일 날 핸드캐리로 Q.C가 엄청나게 들어온다는 소식을 중국으로부터 듣고야 만다. 지난 시즌에서 셀렉되어서 메인으로 진행되는 옷이 매장에 출고되기 전 몇 차례에 걸쳐 품질을 체크하는 업무인 Q.C(Quality Control) 작업. 이때만큼은 디자이너가 아닌 철저한 검품사가 되어야 한다. 사이즈, 봉제사양이 오더대로 정확하게 나왔는지, 불량인 부분은 없는지를 꼼꼼하게 체크해야 하기 때문이다. 납기가 급하여 지체할 틈 없이 바로 봐줘야 한다는 독촉과도 같은 업체의 부탁.. 됐어,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지금은 금요일 홈쇼핑 사를 방문하여 브리핑 할 SS 테마와 컨셉에 관한 자료를 PPT로 만들어놔야 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업무이다. 근데 그럴듯하게 이번 디자인 컨셉을 표현할 수 있는 강력한 한 마디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때 만큼은 뛰어나고 세련된 카피라이터가 되어야 한다.


“샘플실 왜이렇게 지저분하니? ”

강력한 한방의 문구를 찾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사이 옷더미로 난장판이 된 샘플실에 출입한 실장님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비좁은 샘플실의 행거 위로 널부러져 춤을 추고 있는 옷 샘플들, 바빠서 건드릴 틈이 없었지만 S가 봐도 너무했다 싶다. 품평 전에 싹 다 정리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S와 동료 디자이너들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샘플실 정리에 매달린다. 미쳐 마스크와 장갑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하필 오늘 펜슬스커트를 입고 힐을 신고 오는 불찰을 범했다.

S는 펜슬스커트를 입고 풀메이크업을 한 프로페셔널(?)한 비주얼로 온갖 먼지를 뒤집어 쓰면서 미친 듯 샘플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옷더미를 파헤치고 버리고 솎아내고 필요 없는 샘플들을 박스로 패킹한다. 적어도 두 세달에 한번은 하는 이 작업. 이 순간만큼은 힘 센 막노동꾼이 되어야 한다.


근데 더 싫은 상황이 오고야 말았다. 주말 매장지원령이 떨어진 거다. 모든 매장에서 대대적인 세일 행사에 들어갔는데, 이게 도대체 디자이너와는 무슨 상관? 이 기간 동안의 주말에 매장에는 일손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인데 회사에서는 비용절감을 위해 아르바이트도 고용 못하게 하는 상황이다. 그리하여 힘없고 만만한 직원들보고 주말 판매지원을 나가라는 지령을 내린 것이다. 디자이너보고 매장에서 판촉도 뛰란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S는 이러한 부당한 업무지시가 다른 의류회사에서도 버젓이 행해진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이번 주말, 그녀는 더 없는 프로 판매사원이 되어 회사 매출에 기여할 것이다.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디자이너한테 패턴까지 뜨라고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패턴사의 업무는 패턴뜨는 일, 이 한가지 밖에 없다. 기획실의 엠디는 시즌의 물량을 계획하고 상품의 매출을 분석하는 일을 한다. 타부서 사람들이 하는 일은 명확하게 몇 가지로 압축하여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패션디자이너는 업무의 불확실한 경계선을 넘나들며 모든 일을 닥치는대로 다 하는 멀티태스킹의 신이며 만능의 돌쇠이다.

때로는 엠디 업무인 시즌 구성과 물량계획까지 담당하고 상품생산과정이 원활하지 않거나 생산부서가 체계적으로 짜여있지 않을 때에는 발 벗고 나서서 생산 진행 업무까지 도맡아야 하는 것이 한국 패션디자이너들의 현 모습이다. 대기업이나 회사 규모가 조금 클 경우 마케팅 부서가 따로 있어서 한해, 한 시즌의 트렌드를 분석하고 제시해 주지만, 한국의 거의 모든 디자이너들은 트렌드 분석부터 이를 반영한 시즌 PPT나 맵핑 작업부터 손수 하고 있다. 간혹 기회가 닿아 해외에 나가 일하게 되는 한국디자이너들에게 그 나라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우리 디자이너들의 업무스피드는 타국의 추종을 불허하며 모든 분야에서서 만능(?)인 멀티플레이어이기 때문이다.

반면 해외 외국회사에서만 근무했던 디자이너가 한국에 들어와 일할 경우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퇴사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왜냐고? 그들은 디자이너마저 업무의 세분화가 철저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특정 분야의 업무만 해왔던 디자이너가 폭넓은 멀티태스킹을 요하는 한국 패션회사에서 버텨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능 멀티태스킹의 능력을 갖춘 국내의 모든 패션디자이너들에게 뜨거운 응원을 보내며 존경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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