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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 지상주의

by 이라IRA


- 에피소드 1.

5일간의 구정 연휴 후 S는 아침에 사무실에서 만난 실장에게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S가 알던 실장이 아닌 얼굴 전체가 퉁퉁 부은 웬 이상한 여자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연휴 직전, S의 실장은 바늘이 촘촘히 박힌 실로 얼굴전체를 당겨 올리는 리프팅 시술을 받고 왔다고 했다. 연휴 후에 더 이상의 휴가를 낼 수 없는 사내 분위기 때문에 그냥 그 상태로 출근할 수밖에 없었던 실장의 얼굴은 고스트버스터즈에 나오는 슈크림 괴물을 연상시켰다.

“붓기가 있어 이렇지, 빠지면 자연스러워진대.”

사뭇 쑥스럽고도 상기된 얼굴로, 그러나 웃으니까 더 슈크림 괴물이 되어 버린 얼굴로 실장은 조심스럽게 말한다.

“어머, 아니예요, 실장님. 너무 어려지셨어요!.” 환호와 가식적인 감탄이 뒤섞인 부하디자이너들의 격려가 뒤따른다. 아, 또 한명의 얼굴이 이렇게 페이스 오프 face-off 되었다.


- 에피소드 2

“ 너 옷이 그게 뭐야 오늘 디자인실 밖으로 나가지마.”

새로 입사한 막내디자이너에게 실장이 독사처럼 쏘아댔다. S는 막내를 서둘러 샘플실에 데리고 들어가 옷을 갈아입혔다. 그 주 주말 실장은 막내를 강남의 모 백화점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는 막내에게 강제로 옷을 사게 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돈 없는 막내는 멀리 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오로 첫 월급도 받기 전 마구 카드를 긁어대며 옷을 사들였다.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예쁘지 않으면 여자로서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한국의 망조 들린 외모지상주의는 이미 사람들 개개인의 정서에 뿌리박혀 있다. 당근 이러한 분위기에 적극 동참하고 충실하게 편승하는 부류 중에 패션 디자이너가 빠질 수 있을까.

피부리프팅, 보톡스, 필러 등의 각종 시술과 쌍커풀, 코, 턱깎기, 광대 돌려깎기(?) 가슴수술 등의 칼로 난도질을 당하는 무시무시한 수술까지, 그야말로 목숨의 위협을 무릎 쓰고라도 (죽더라도 병원측에 책임없다는 각서를 쓰고 수술을 시작한다.) 예뻐지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감수한다. 외모에 매달리는 디자이너들은 연예인 못지않게 예쁜 외모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국여자들과 다른 독특한 점이 디자이너들에게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외모지상주의’를 남자들에게도 적용시킨다는 점이다.


- 에피소드 3


남자 피팅 모델이 오기로 한 시간이 20분이나 지났는데 연락도 없이 올 생각을 않아 S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종종 말도 없이 이렇게 지각하는 모델을 두고 S와 동료들은 이 참에 남자모델의 버릇을 고쳐놔야 한다며 화를 내고 있다. 그러나 디자인실 문을 열고 헐레벌떡 달려 들어오는 ‘그’를 보고는 마음에 쌓여있던 약간의 짜증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상황은 종결되었다. 잘생긴 얼굴로 그저 디자이너 누나들에게 환하게 한번 웃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피팅모델 M은 잘생긴데다 스타일리시하기까지 하다. 디자이너들에게 M이 무엇을 하는지, 집안 배경이 어떤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잘생기고 옷까지 잘 입는데 더 이상 뭘 바랄까.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패션 디자이너가 늘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은 외적인 것이다. 트렌드, 스타일, ‘멋지고 간지 나는 세련미’, 이는 패션디자이너의 정체성이자 업무상 핵심이다. 트렌디하고 예쁜 것을 최우선으로 보는 디자이너가 남자를 볼 때엔 그런 점을 애써 외면하려 하는 건 극단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발버둥 친들 외모와 스타일을 쏙 빼고 남자를 볼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경제적으로 능력이 출중한 남자라 할지라도 외적으로 자기관리 하지 않는 남자들을 우리들은 본능적으로(?) 용서하지 못한다.

이런 성향이 어떻게 보면 양성평등 면에서는 공평하고 일관성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긍정적인 면모(?)로 평가하고 싶다. ‘외모지상주의’라는 병적인 가치를 여자에게만 국한시키지 않는다는 면에서 디자이너들은 합리적이다. 사실 남자든 여자든 이성을 처음 볼 때엔 외적인 면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성적매력에 매료되어야 이성으로서 호감이 가는 것은 사람이라면 매한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여자가 남자와는 다르게 이성의 외적인 매력을 제쳐두고 상대방의 경제적 능력부터 보는 큰 이유는 여자의 경제력이 남자보다 열위에 있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한국은 OECD 국가 중 남 여 임금이 격차가 가장 큰 나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가사, 육아 전담에 따른 경력 단절과 이에 대한 문제인식 부족, 국가의 미비한 지원정책으로 인해 여성의 일자리는 일용직, 계약직 등으로 남자에 비해 퀄리티가 떨어진다. 지속 가능한 일자리가 여자들에게는 점점 없어지고 자연스럽게 남자와 소득 격차는 더 벌어지는 것이다. 한국 여자들은 장기적으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자의 외모를 제쳐두고 경제적 능력으로써만 남자를 고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자 디자이너는 이성을 보는 자신의 취향과 남자의 비주얼을 애써 외면한 채 경제력만을 고려하여 남자를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 부분만큼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솔직하게 따르는 주체적인 존재이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실제로 남자에게서 독립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는 이들이 갖고 있는 성향 중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다.

다만 잘 생긴 남자를 볼 때 경제적 능력이 베이스가 되어야만 하는 디자이너라면 그런 남자는 몹시 드물다는 점을 있지 말길 바란다. 경제적으로 능력 있고 외적으로도 출중한 남자는 TV 드라마나 B급 로맨스 소설에서 존재하는데 디자이너들은 특히 TV드라마를 너무나 열심히들 보는 게 문제다. 그러한 남자들이 극소수로나마 존재하더라도 그 극소수를 만나기란 또 얼마나 하늘에 별 따기인가.

사실 여자디자이너들이 꿈같은 로맨스에 목이 말라 있어도 현실에서는 밤낮으로 정신없이 일만 하느라 누군가를 만날 시간도 없고, 그래서 달달한 연애를 하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주말엔 시체처럼 뻗어있기 바쁜 가엾은 존재들. 그래서 디자이너 팀장, 실장들 중엔 노처녀들이 많다. 이들 중엔 자기소신이 있어 결혼을 안한 이들보다 일에 쫓겨 혼기를 놓친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연애를 하고 거기에 자신의 본능에 충실히 따르는 능력 있는 디자이너가 가끔 있는데 이들은 실제로 자신보다 젊고 어린, 어디서 만났는지 모르는 훈남과 혼인하여 모든 디자이너들의 부러움과 경외의 대상(?) 이 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


- 에피소드 4


"T브랜드의 K실장, 예전 회사에서 연봉 원하는 대로 올려주는 조건으로 재입사 스카웃 제의 들어왔다며? “

“근데 조건을 붙였다네. 자기 신랑 생산부서에 입사시켜달라는 인사조건 말이야.”

T브랜드의 K실장. 7년전 C 회사에서 신규 브랜드를 론칭하고 대박을 터트리는 데에 공을 세웠던 디자이너로 뛰어난 스타일 감각과 기획력, 리더십을 두루 갖춘 실력파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C 사에서 일하던 중 타 회사에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웃 제의를 받아 이직하여 일하는 동안 C사의 브랜드의 매출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C사의 오너가 그녀에게 지금보다 더 높은 연봉으로 재입사를 제의했던 것. 그녀의 남편은 C사에서 일할 당시 같은 회사에 입사했던 열한 살 어린 신입디자이너였다. 그의 큰 키와 출중한 외모, 눈웃음에 반해버린 그녀는 적극적인 구애로 그를 자신의 남자로 만드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그녀의 잘생긴 그는 불행히도 디자이너로서는 재능도 적성도 없어 몇 년 지나지 않아 일을 그만두고 현재 새 직업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한국 사회에서는 참으로 낯설고 기이한 풍경이다. 어리고 잘생긴 짝을 먹여 살리는 여자의 사연은 그러나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생소하거나 별로 놀라울 일이 아니다. 19세기 프랑스 여류작가 조르주 상드는 이렇게 말했다.

“철저히 자유로운 주인으로 살아라. 남의 입방아에 상처받는 시간에 사랑하는 이와의 시간을 즐겨라.”

음악가 쇼팽의 연인이자 수많은 애인과 자유분방하게 연애를 즐겼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조르주 상드는 자신이 원하는 바에 충실했던 여성이었다. 여자 디자이너들의 기질은 어찌 보면 그녀와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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