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소드 1.
“결혼 계획은 있나요 ?”
혼기에 들어선 여자들이 입사 면접을 볼 때 많이 듣는 질문인데 아마 많이들 동감할 것이다. 이 질문은 특히 비혼 여성 패션 디자이너들이 필수적으로 직면하는 질문이다. S도 회사 면접 때 어김없이 이 질문을 받았다.
“아니요, 아직은 없습니다.”
이렇게 답변을 하니 면접관이 이어 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그럼 남자친구는 있나요?”
이 따위의 질문을 쏟아내는 면접관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심정을 누르며 S는 얼굴에 띄운 미소를 유지하려 애썼다. 더 높은 연봉과 좋은 조건의 회사로 이직하기 위해 S는 이런 것쯤은 쿨한 마인드로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S는 과장되게 쿨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아니요 없고 앞으로도 생길 계획 없습니다.”
S는 사귄지 3년 되는 남자친구가 있고 곧 결혼도 할 예정이다. 자신의 대답이 조롱 섞인 반어법이라는 것을 무신경한 상대방은 눈치라도 챌까?
만약 S가 기혼녀라면 어떤 질문이 나왔을까? S의 선배 K는 슬하에 딸 하나를 둔 기혼녀이다. 그는 대기업 E사의 면접관에게 이런 질문을 듣고 격분하게 된다.
“딸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둘째 계획이 있습니까?”
이 불합리하고 천박한 면접관에게 K는 한 마디 쏘아 붙이고 면접장을 박차고 돌아섰다.
“그건 내 개인의 가정사이고 당신이 상관할 일 아닙니다.”
하지만 절박한 처지에 놓인 수많은 ‘을’ 들은 K와는 다르게 이 질문을 감당해 낼 것이다. 그리고 이 예의 없는 질문에 너무도 공손하게 거짓 대답을 할 것이다.
“둘째 계획은 없습니다.”
안 그러면 일자리를 얻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 에피소드 2.
“패션 디자이너 자식들은 대부분 꼴통이야 .”
술자리에서 K는 울먹거리며 S에게 말햇다. 초등학교 2학년인 자신의 딸이 학교에서 관찰이 필요한 문제학생이라는 점을 고백한 것이다. 과제는 소홀히 하고 성적도 저조할 뿐만 아니라 학우들에게 자주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는 등의 문제행동을 일삼는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K는 담임교사로부터 전해 들었다.
“어머니께서 댁에 항상 늦게 오신다는 애기를 들었어요. 지금보다 관심과 보살핌이 더 필요합니다.”
K는 아이를 위해 바로 회사에 사표를 내고 당분간 육아에만 전념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네 달이 지나고 놀랄만한 일이 벌어진다. 예전에 보였던 아이의 모든 문제행동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것. 게다가 딸의 성적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 얘기를 하면서 K는 눈물을 쏟아냈다.
일과 가정의 양립, 한국의 모든 워킹 맘들에게 지워지는 가장 부담스럽고 괴로운 미션이다. 특히, 직장생활에 거의 올인하다시피 해야 하는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결혼, 출산, 육아의 삶이 감당하기 힘든 지옥의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애 엄마가 어떻게 주말에 시장조사를 다니겠냐?”
평일이든 주말이든 유연하게, 그리고 기동력 있게(?) 시장조사에 임해야 하는 패션디자이너로서 여성 기혼자가 종종 면접에서 탈락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들이 결혼하여 아이를 가졌다는 점이다.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여성 직원의 결혼과 출산에 대해 걱정하는 점은 현재 한국 기업의 입장이라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여성은 출산하는 순간 육아 전담사나 적어도 제 1의 책임자가 되어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되니까 말이다. 육아 때문에 업무를 제쳐두고 조퇴하는 여성 직원은 많이 봤어도 그런 남성 직원을 본 적은 드물었다. 우리 사회도 점점 바뀌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육아의 의무와 책임을 여성에게 지우고 의지하는 분위기가 강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한 국가적 지원은 미비하다. 늦은 밤 시간까지 운영하는 시간 연장 어린이집은 2015년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4만개도 채 되지 않았다. 2015년 태어난 총 출생아 수가 약 44만명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턱 없이 부족한 숫자이다. 실제로 전국의 시간 연장 어린이 집은 1년 내내 여유 없이 꽉 차 있어 이곳에 아이를 맡기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한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있는 패션디자이너 워킹 맘들은 아이를 친정부모 혹은 시댁 부모에게 아예 맡겨서 키운다. 그렇지 않으면 눈치를 보며 회사의 기대치보다 일찍 퇴근하고 상대적으로 업무를 소홀히 하는 일이 반복되다가 결국 해고를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주중에는 부모 집에 아이를 맡기고 주말에만 아이를 보러가는 디자이너들. 그들의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경우가 많다.
무엇이든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가부장적인 성 역할분담만큼은 좀처럼 바뀌고 있지 않은 현실에 답답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먹고살기 팍팍해져 버린 경제적 구조에서 맞벌이가 필수가 되어버린 상황이란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사회 구성원의 반이나 되는 여성 인력을 적극 활용하는 편이 국제 경쟁력에서도 유리하다면 여성이 출산과 육아로 인해서 경력 단절이 되지 않도록 국가와 사회 모두가 협력해야 한다. 육아 때문에 엄마가 사회생활에서 원치 않게 단절되는 이야기는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
‘워킹맘’이라는 단어는 존재하는데 ‘워킹파’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남성은 육아와 가사문제에서 여성보다 한 발 뒤로 빠져있다. 업무강도가 센 여성 디자이너들이 결혼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첫 번째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디자이너들 뿐이겠는가, 이대로 계속 제자리걸음인 채 출산과 육아, 가사 분담 문제에서 양성 간의 불평등이 지속된다면 출산율은 계속 세계 꼴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직장에서 끝까지 살아남고 싶은 여성 중 많은 이들은 지금 상태로는 출산은 아예 계획하지도 않을 뿐더러 결혼조차도 하기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