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피소드 1.
S가 최근에 이직한 곳은 K사의 N 브랜드이다. S는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성 직원의 비율이 월등히 많은 K사 직원의 성비는 남성과 여성이 3:7인데 반해 부장급 이상의 비율은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5:1이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상무급 이상의 본부장들은 100% 남성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바로 회사측에서는 패션회사 업무의 특성상 꼼꼼하고 세심한 기질이 필요한 여성 실무자를 회사는 더 선호한다는 점이다. 회사 내에서도 업무평가 면에서 여성 직원들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눈을 씻고 다시 봐도 네 명의 본부장 급에 해당되는 임원 중에 여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런 현상은 기획 상품부나 영업부가 아닌 디자인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야말로 디자이너 인원의 90%의 비중을 이루고 초 여초성비에도 불구하고 여자들만 바글거리는 디자인실의 헤드 CD(Creative Director) 자리에는 여성이 아닌 남성디자이너가 앉아 있다. S의 회사가 그렇고 S의 전 회사가 그랬고 S의 친구 디자이너들의 회사가 그렇다.
S가 최근에 이직한 K사는 세 개의 캐주얼 의류 브랜드와 두 개의 여성복 브랜드를 갖고 있는 중견 규모의 패션기업이다. 여성복 브랜드 두 개를 제외하고 S가 일하는 N브랜드와 함께 다른 두 개의 캐주얼 브랜드 모두 남성패션의 성격이 더 강한 브랜드이다. 그런데 남성성이 더 강한 캐주얼 브랜드에서 디자이너 실무진의 90%이상은 여성디자이너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부서장인 디자이너 부장은 단연 남성디자이너이다. S는 여성 옷은 여자가 더 잘 할 수 있으므로 여성복 구성원의 100%가 여성디자이너라는 점은 이해했다. 그러나 ‘남성 옷이 더 강한 캐주얼 브랜드에서조차 왜 여성디자이너 수가 더 많으며 그런데도 왜 부서장은 굳이 그 드문 남성디자이너들 가운데에서 한 명이 올라갈까?’ 하는 의문을 떨쳐낼 수 없었다.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왜 이런 기이한 광경이 벌어지는 걸까?
첫째, 일반적으로 여성패션은 게이가 아닌 이상 남성이 디자인 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여성패션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남성 패션은 여성 디자이너들이 얼마든지 디자인할 수 있다. 이것이 능력의 차이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관심의 차이라는 점이라고는 분명히 얘기할 수 있다.
남성이 주인공인 액션과 히어로 물의 영화를 남성만이 관람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남성성이 강한 영화에 남성배우들 일색인 액션 히어로물이더라도 연출 수준이 높고 재미만 있다면 상당수의 여성 관람객을 끌어들일 수 있고 그들을 매니아층으로까지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는 어떻게 해도 남성 관객을 끌어들이기 쉽지 않다. 장르가 액션이든 혹은 스릴러, 미스터리이든, 코미디이든 간에 여성이 주인공이거나 여성의 삶을 다룬 영화는 비록 흥행하더라도 주 고객층은 여성이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남자들은 여성의 라이프스타일과 스토리에 별 관심이 없다.
패션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는 (디자이너임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라이프스타일 중의 하나인 여성패션에 관심이 없다. ‘옷에 미친 남자디자이너’ 라고 한다면 그저 ‘남자 옷’에 국한해서 미쳤을 뿐이다. 여성 패션에 미쳐있다면 그 사람은 스트레이트(이성애자)가 아닌 게이일 확률이 높으리라. 마크제이콥스, 알렉산더 맥퀸, 칼 라거펠트, 크리스토퍼 베일리, 도미니코 돌체와 스테파노 가바나, 발렌티노 등의 명망 높은 여성 명품 패션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들이 게이인 점을 생각하면 그렇다.
결론은 게이가 아닌 스트레이트 남성 디자이너들은 오로지 자신들이 걸치는 남성복 혹은 남성 캐주얼에 국한해서만 디자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들은 소위말해 패션 디자인계의 ‘절름발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여성 디자이너들은 그렇지 않다. 여자들은 남성패션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관찰한다. 여성복, 남성복, 남 여 캐주얼, 키즈 등 분야 불문하고 여성 디자이너들은 패션분야 전반에 걸쳐 포진되어 있는 이유이다. 특히 남 여 캐주얼 분야에서 여성 디자이너들은 남성과 달리 여성패션 뿐만 아니라 남성패션 디자인에도 두루 재능과 감각을 갖추고 있는 인재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캐주얼 실무진에 여성디자이너의 비율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임원급으로 올라가면 정말 이상하게도 부장 이상의 디렉터 디자이너와 기획 엠디들이 거의 남성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들이 여성패션을 잘 모르는 ‘절름발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유리천장은 패션회사에도 어김없이 존재한다.
나는 이런 현상이 생기는 원인 중의 가장 큰 문화를 한국의 ‘접대문화’라고 보고 있다. ‘접대문화’를 꼭 여자를 대동하고 진탕 놀며 그 안에서 은밀한 거래를 하는 문화에 국한하고 싶지는 않다. 새벽까지 앉아 술을 마시며 상사를 모시는 모든 문화를 ‘접대문화’로 규정한다면 확실히 여성디자이너는 이 접대문화에서 불리한 것이 사실이다. 술자리에 진득하게 앉아 상사의 비위를 맞추고 그러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은근슬쩍 어필하는 ‘술자리 회식‘은 한국 직장문화에서 아직까지 매우 중요하고 높은 위상(?)을 자랑하고 있다. 오죽하면 ’승진은 주량으로 결정된다.‘는 말까지 있을까?
결혼한 여자가 아무리 주당이라 한들 가정을 제끼고 3차, 4차로 치닫는 회식에 매번 꿋꿋이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위인은 드물다. 여성이 가사와 육아의 책임을 가볍게 여기면 바로 비난을 받는 사회분위기에서 회사의 빡센 회식문화에 여성이 온전히 올인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회식문화에 올인하지 못하는 점을 분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업무 능력에서 모자람이 없거나 더 뛰어나더라도 승진하는 데에 한계가 있는 나의 자매들, 여성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에 화가 날 뿐이다.
한국은 노동자의 근로시간이 세계최고수준을 자랑한다. 여기에다 노동자가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며 회사에 올인하는 분위기를 당연시 여기는 한국에서 워킹맘이 직장에서 끝까지 살아남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자가 가정과 육아를 2순위로 제쳐두는 순간, 가정과 사회에서 쏟아지는 싸늘한 시선과 질타를 면하기 힘들고 이럴 때 대부분의 여자는 회사를 포기하고 가정을 택하게 된다. 그래서 여성 실무진들이 포진하고 있는 여초세계의 패션분야에서도 본부장 급으로 승진하는 이들은 다른 분야와 다르지 않게 대부분 남성이다.
- 에피소드 2.
하지만 S가 속한 디자인팀의 P실장은 회사가 제공하는 회식문화를 포함한 회사의 모든 일에 올인하기로 했다. (P실장은 싱글이기 때문일까?) 그래서 주당에다 알콜 중독기까지 살짝 보이고 있는 대표이사를 회식 때마다 보필하며 끝까지 남아있기로 한다. 회사 대표는 그녀의 마인드에 깊이 감동을 받았다. 자, P실장은 그토록 꿈꾸는 디렉터이자 디자이너 본부장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는 회식의 마지막 라운드에서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회사 대표를 포함한 남자 직원들이 자신을 자꾸 집에 보내려는 뉘앙스를 보이는 것이다. 여자의 몸으로 밤샘 술자리는 무리라며 그들은 P실장을 무척이나 배려하는 듯 굴지만 이는 말 그대로 ‘척’일 뿐이라는 점을 P실장은 이미 알고 있다. 소위 그들끼리 얘기하는 ‘좋은 곳’에 가려는 속셈이라는 것을 말이다. 남성 직원들이 매너 있게 잡아주는 택시를 그녀는 모르는 척 하며 잡아타고 집에 돌아와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룸살롱이나 가라오케에 갈 것이다. 그리고 내일, 오늘 입었던 동일한 옷차림으로 회사에 출근하겠지. 직장생활과 회식의 꽃(?) 인 술 문화, 접대문화 (여기에 간혹 매춘이 껴 있는) 에 여성 직원은 따돌림을 당한다. 여초 분야인 패션 디자인의 세계에서조차 여성은 남성들이 치는 두꺼운 벽과 투명한 천장 앞에서 무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