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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경력, 다른 연봉

by 이라IRA

- 에피소드

S의 동료인 J는 최근 사표를 냈다. 연봉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디자인디렉터와 큰 마찰을 일으키고 만 것이다. J가 원하는 연봉은 현재 받는 연봉에서 천만 원을 높인 금액이었다. J의 동료들은 무리수를 두어도 너무 두었던 J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지 의심했다.

“한 해에 500 올리는 사람도 드물다던데 천을 무슨 수로 올리니? 제 정신이야?”

그러나 여전히 화가 나 있는 J는 씩씩대며 말했다.

“G는 나보다 천2백을 더 받던데.”

“뭐?!”

동료들은 귀를 의심했다. J와 G는 서른 두 살의 동갑내기에 경력도 서로 엇비슷한 디자이너들이다. G가 군대 다녀온 기간을 빼면 J가 오히려 2년 경력이 더 많은 셈이다. 설마 군대 가산점이 패션계에서 그렇게나 높았던 건가? J와 G의 연봉은 어떻게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는 차이였다. G의 전 브랜드 경력이 J보다 더 낫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두 사람의 연봉 차이는 인정하기 힘들었다. 패션계가 박봉이라더니 그것은 여성에게만 통용되었던 사항이었나? 천2백만 원을 더 받는 G의 연봉을 계산해보니 그 나이에 받는 급여 치고 분명 박봉은 아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J가 알아낸 정보에( 어디서 어떻게 아는지 J는 동료들 중 가장 빠른 정보력을 자랑한다.) 의하면 같은 부장 급이어도 성별 간의 연봉이 크게는 2천만 원이나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었다. S는 깨달았다. 패션계의 직원들이 박봉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패션업계가 영세한 규모로 힘들게 운영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직원의 다수가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여성 디자이너는 남성 디자이너와 비슷한 실력, 동일한 업무강도, 동일한 노력으로 겨루어서는 결코 남성을 제치고 간부급에 올라가지 못한다. 고군분투하여 설령 원하는 위치에 올라가더라도 남성에게 연봉에서 밀리는 수모를 당한다.

회사의 대표이사와 간부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런 생각들을 하는 것 같다. 한 집안의 가장인 (혹은 미래의 가장이 될) 남성 직원에게 여성보다는 더 높은 연봉을 줘야 하고 여성보다 먼저 임원으로 끌어줘야 한다는 당위성 같은 것 말이다. 신입 디자이너 시절에는 엇비슷했던 연봉이, 경력이 쌓일수록 뛰는 폭이 너무나 다른 케이스를 찾아보면 디자이너 간의 실력차이보다는 성별 차이였을 때 더 심한 것이 사실이다.

여성 디자이너가 남성 디자이너에게 밀리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실력을 평가받을 수 있는 분야가 있다. 게이를 제외한 남자 디자이너들이 손을 댈 수 없는 영 캐주얼, 여성, 캐릭터 캐주얼인 여성복 브랜드가 그것이다. 여자만이 관심을 갖고 그래서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이 분야에서 인력의 99.9%는 여성디자이너다, 여성복 브랜드에서는 기획팀의 MD들도 거의 여성으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이 안에서는 어떤 차별도 겪지 않고 오로지 실력으로만 평가받을 수 있다. 성차별을 당하지 않으려면 남성이 없는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웃프지 않은가?

디자이너를 희망하는 여성 지망생들에게 조언한다면, 디자이너가 되려면 가급적 여성복 브랜드로 지원하길 바란다. 하지만 한 가지 각오해야 할 점은 있다. 여성복 분야는 패션계에서 가장 바쁘고 힘든 분야이다. 혼이 빠질 정도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아수라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비수기는 없다. 그들은 쉬임없이 품평을 준비해야 한다. 여성복 브랜드 매장에 가보면 끊이지 않고 신상품이 나오는 이유이다. 가장 유행 주기가 짧은 패션 분야는 단연 여성복이기 때문이다.

캐주얼 패션이 1년에 4회에서 6회의 시즌별 품평을 하는 데에 비해 여성복 브랜드는 짧게는 2주, 길게는 한 달 간격으로 텀 없는 품평을 한다. 매일 새로운 디자인을 뽑아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업무의 강도가 올라가고 스케줄은 타이트해 진다. 이들에게 주말 동안 여유 있게 여가를 즐길 틈 따위는 없다. 주말엔 시장조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패션계에서는 여성복 브랜드의 수가 가장 많고 그만큼 경쟁도 가장 치열하기 때문에 꼼꼼하고도 방대한 사전조사와 함께 치밀한 전략, 정확한 상품 적중도를 갖춰야만 혹독한 경쟁의 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패션계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는 여성복 분야에서만 유일하게 성 차별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나 슬프게도 여성 패션계는 극한 직업이라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5년 동안 캐주얼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여성복이 욕심나서 분야를 바꿨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6개월 후 만신창이가 되어 다시 캐주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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