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퍼홀릭
- 에피소드
디자이너 H의 아들 D는 초등학교 1학년이다. 그는 어느 날 학교수업 중 ‘주말에 부모와 자주 가는 소풍 여행지’에 관한 얘기를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저마다 좋아하는 장소를 얘기한다.
“동물원이요!”
“놀이공원이요!”
“수영장이요!”
담임교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D에게 눈을 돌려 친절한 웃음을 띈 채 물어보았다.
“D는 주말여행으로 부모님과 어딜 가니?”
담임교사의 질문을 받은 D는 세상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백화점이요.”
-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지긋지긋할 정도로 백화점에 다닐 것이다.’
디자이너가 되면 최소한 한 달에 한번 이상은 백화점에 가야 한다. 시장조사를 마치 몸에 밴 습관과도 같이 생각해야 디자이너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아이를 가진 디자이너일 경우 아이를 마땅히 맡길 곳이 없으니 주말에 대동하고 백화점에 다닐 수밖에 없다. 부모 둘 다 디자이너인 아이는 가엾게도 주말의 소풍지가 종종 백화점이 되기도 하는데 이런 광경이 재미있기도 하고 아이를 생각하면 짠하기도 하다.
- 에피소드 2.
‘넌 해외에서 아예 사니? 부럽다, 정말!’
‘여기 뉴욕이야? 멋지다!’
S의 SNS에 도배되어 있는 외국 풍경의 사진들을 보고 지인들의 한마디씩 달리는 댓글들, S는 작년 한해만 해도 오키나와, 홍콩, 뉴욕 등 총 세 번의 해외출장을 다녀왔다. 매번 같은 항공사를 이용한 덕분에 꽤 많은 마일리지가 쌓여서 마일리지만으로 해외휴양지 티켓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S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곧 여름휴가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번 휴가는 어딜 가도 인산인해의 인파 속 국내여행이 아닌 조용한 해외에서 푹 쉬다 오기로 결정했다. 업무에 충실한 보너스로써 항공 마일리지를 얻게 된 것 같아 왠지 기분이 더 좋다. 평소에 스킨스쿠버를 배우고 싶었던 S는 필리핀에서 국내 가격의 반 가격으로 레슨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번 휴가처를 세부로 결정했다. 세부적인 일정을 짜는 S의 입에서는 노랫소리가 나온다. 여행은 현장에서 즐기는 것도 좋지만 가기 전에 크고 작은 일정을 짜는 과정에서도 쏠쏠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현직 디자이너의 리얼 담론
미드 ‘가십걸’의 블레어가 파리여행 중 온갖 명품브랜드의 쇼핑백을 양손 가득히 든 채, 마치 쇼핑백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다는 듯한 표정으로 걷는 장면은 여자라면 한 번 쯤은 꿈꾸는 로망일 것이다. 영화 속, 드라마 속 장면을 내가 실제로 연출만 해볼 수 있다면 수많은 브랜드 매장을 다니느라 몇 킬로미터씩 걸어서 발바닥이 욱신거리는 일쯤은 기꺼이 감당할 수 있다. 많은 재산을 가지지 않고서도 혹은 그런 애인을 두지 않고서도 각종 브랜드의 옷을 원하는 만큼 살 수 있는 직업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패션디자이너다.
품평 시즌에 돌입하면 디자인 참조용 오리지날 샘플을 구매해야 할 시점이 온다. 앞서 얘기했듯이 완전한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재정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의류회사일 경우 디자인 팀 중 몇 명을 선정하여 해외 출장을 보내준다. 매일같이 사무실 안에서 갇힌 기분이었던 디자이너들에게는 모처럼 기분전환을 할 수 있는 기회인 셈이다. 비록 가서 몰래 카메라 작업을 열심히 해야 하는 의무감이 주어지더라도 말이다. 국내에서는 살 수 없는 독특하고 트렌디한 옷을 마음껏 쇼핑할 수 있는 출장은 디자이너들에게 활력의 시간이 되어 주기도 한다. 비록 내 옷은 아니지만 내 옷을 사는 것이나 다름없는 기분으로 쇼핑을 할 수 있다는 점, 유명한 해외 패션 거리를 활보하며 예쁜 옷을 마음껏 구경하고 쇼핑할 수 있다는 점은 쇼퍼홀릭인 사람이라면 더 없이 매력적인 일이다.
백화점 가는 것이 취미인 사람, 해외에 나가서 영화처럼 패션거리를 다니며 쇼핑하고 싶은 쇼퍼홀릭이여, 패션 디자이너가 되면 할 수 있다. 지갑이 얇아진다는 부담도 없고 쇼핑중독이라는 비난도 면하면서 마음껏 쇼핑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 직업인가.
여행을 좋아하고 특히 해외여행을 즐기는 이들, 거기에 쇼퍼홀릭이라면 패션디자이너가 되어라.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